1925년에,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교육회에서 식민 교육 보급을 위해 일본어로 발행한 교육 잡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학무국 내에 본회를 두었던 조선교육회에서 일본어로 발행한 월간 교육 잡지이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교육회’는 두 종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1920년 6월 26일 민족교육 발전을 위해 한규설(韓圭卨)·유근(柳瑾)·이상재(李商在) 등이 발기한 조선인교육 단체이며, 다른 하나는 1902년 결성된 경성교육회를 모체로 1915년 확대 개편된 조선교육연구회가 1923년 4월 총독부 학무국 내에 본회를 두면서 명칭을 변경한 단체이다.
『문교의 조선(文敎の朝鮮)』은 후자의 단체에서 발행한 월간 교육잡지로, 1925년 9월 창간하여 1945년 1월까지 통권 229호까지 발행되었다.
학무국 내 본회를 둔 조선교육회는 1902년 결성된 경성교육회를 모체로 한다. 이 단체는 1915년 조선교육연구회로 확대 개편되었으며, 제3차 조선교육령 개정 이후인 1923년 4월 1일 조선교육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때 회장은 정무총감이 맡았으며, 각도 교육위원회(各道敎育委員會)를 지회로 두고, 그 밑에 부군도(府郡島)를 분회로 두었다. 이처럼 사설기관이었던 조선교육연구회를 학무국 내에 둔 까닭은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조선에서의 공적·사적 교육을 모두 통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다.
이 단체의 활동 목적은 『동아일보』 1923년 3월 29일자 기사에서 “종래(從來)의 목적은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 기타에 관(關)한 법령(法令)을 주지(主旨)로 하여 차(此)에 관한 시설보급(施設普及)의 건(件)을 연구함에 지(止)하야 기사업(其事業)의 범위(範圍)가 태(殆)히 협(狹)할 뿐만 아니라, 우(又) 일편(一便)으로는 관료기관(官僚機關)의 감(感)이 유(有)하였으나 금반(今般)에는 기사업(其事業) 범위(範圍)를 광(廣)히 하여 조선교육(朝鮮敎育)에 관한 사적(私的) 공적(公的)을 물론(勿論)하고, 일반(一般) 교육 사업에 원조(援助)를 기(期)할 터”라고 보도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때 이 단체가 내세웠던 주요 사업은 ‘교육에 관한 의견 발표’, ‘교육 및 자료에 관한 사항 연구’, ‘교육상 반드시 필요한 사항 조사’, ‘교육에 관한 잡지 발행 및 교육상 유익한 도서의 간행’, ‘교육 공적자 표창’, ‘교육·학술에 관한 강연회, 강습회 개최’, ‘사회교육에 관한 시설 및 지도 장려’, ‘조선 교육 사정 소개’, ‘교육 관계자 공제 시설(共濟施設) 및 장려’, ‘학사 시찰(學事視察) 및 연구를 위한 회원 파견(派遣)’ 등 10개 항이었다.
이러한 사업은 조선에서의 교육을 위한 것이라고 강변하였지만, 본질적으로는 조선에서의 식민교육 보급을 위한 것이었으며, 공제사업(共濟事業)의 경우도 조선에서 교육사업에 종사하는 일본인 교육자들이나 일부 친일적인 조선인을 위한 것이었다.
양장본. 책의 크기는 세로 22.5㎝, 가로 15㎝이며, 분량은 각 호마다 달라 적을 때에는 30쪽, 특집호와 같이 많을 때에는 180쪽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1925년 9월호 창간호부터 1945년 1월 통권 229호까지 세 차례의 휴간(1941년 9월, 1943년 3월, 5월)과 한 차례의 합호(1944년 10·11월 통권 207호)를 제외하면, 지속적으로 출간되었다.
창간호는 표지를 포함하여 140쪽 분량으로, 판권의 편집 겸 발행자 이와스케 스게이치(岩佐重一), 발행소 경성부 학무국 내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 인쇄소 경성부 서소문(西小門)의 아카키 산호우(赤崎參輔), 인쇄자 조선인쇄주식회사(朝鮮印刷株式會社)로 되어 있다. 그 후 편집 겸 발행자는 몇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발행자와 인쇄자는 변화가 없다.
조선총독부의 교육시책, 조선교육과 관련된 각종 논문, 조사 활동, 교육활동 등을 내용으로 하였다. 필자는 대부분 조선총독부의 교육 관리나 교육에 종사하는 일본인들이었으며, 창간호 발행 당시 학무국장으로 조선교육회 부회장을 지냈던 이진호(李軫鎬), 편수 서기관이었던 이원규(李源奎) 등과 같이 일부 조선인이 참여했다.
발간 내용은 교육 잡지를 표방했지만, 통권 제12호(1926.8.)의 ‘조선 산자수명호(朝鮮山紫水明號)’, 통권 14호(1926.10.)의 ‘백두산답사기념호(白頭山踏査記念號)’와 같이 교육 이외의 사항을 다룬 경우도 많았다.
일본 제국주의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7년 이후에는 황국신민의 서사와 함께 황민화 교육과 관련된 내용을 주로 실었으며, 1941년 말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잡지의 분량도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세 차례 휴간과 한 차례 합호 발행도 일제강점기 말기의 물자 부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총독부의 교육시책과 식민교육 상황을 반영한 일본어 잡지라는 점에서 일제 강점기 우민화교육과 황민화교육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볼 수 있다. 특히 이 잡지의 내용과 조선교육회에서 편찬한 각종 교육 관련 자료들은 일제 강점기 학교교육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조선교육회에서 발행한 『보통학교 국어독본 교수일안(普通學校國語讀本敎授日案)』(1926년 전후 수업 지도안 형태로 발행)은 당시 국어로 간주되었던 일본어과 교수·학습 방법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서 광복 이후의 국어 교과 지도안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파악된다.(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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