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흥학회는 1909년 1월 일본에서 설립된 유학생 단체이다. 1905년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는 한국 유학생 수가 급증하면서 태극학회(太極學會), 공수학회(共修學會), 낙동친목회(洛東親睦會), 유학생구락부(留學生俱樂部), 호남학회(湖南學會), 광무학회(光武學會) 등 다수의 유학생 단체가 설립되었다. 이들 단체 중 일부가 통합하여 1908년에 대한학회(大韓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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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흥학회는 1909년 1월 일본에서 설립된 유학생 단체이다. 1905년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는 한국 유학생 수가 급증하면서 태극학회(太極學會), 공수학회(共修學會), 낙동친목회(洛東親睦會), 유학생구락부(留學生俱樂部), 호남학회(湖南學會), 광무학회(光武學會) 등 다수의 유학생 단체가 설립되었다. 이들 단체 중 일부가 통합하여 1908년에 대한학회(大韓學會), 다시 1909년 1월에 대한학회, 태극학회, 공수학회가 통합하여 설립된 단체이다.
대한흥학회는 ‘돈의연학(敦誼硏學)’과 ‘국민의 지덕계발(智德啓發)’을 설립 목적으로 내세우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유학생들 간의 애경사(哀慶事)를 함께 하여 우의를 돈독히 하며, 학업을 서로 권하여 유학생으로서 본래의 임무에 충실하도록 한다는 활동 지침을 규정했다. 또한, 일본에서 얻은 학술을 확장하며 고국 동포의 지덕을 계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대한흥학회의 조직은 회장 1인, 부회장 1인, 총무원 2인, 평의원 25인, 총회 서기원 2인, 평의회 서기원 1인, 집행임원회 서기원 1인, 간사원 5인, 회계부원 5인, 편찬부원 10인, 출판부원 5인, 교육부원 5인, 토론부원 4인 등으로 이루어졌다.
제1차 임원진으로는 회장에 채기두(蔡基斗), 부회장에 최린(崔麟), 총무원에 김홍량(金鴻亮), 최창조(崔昌朝) 등이 선출되었다. 단체 성립 초기 회원 수는 약 560명이었다. 대한흥학회는 기관지와 도서의 저작 출판, 토론 · 연설 및 체육 장려, 환난상구(患難相救) 및 경사축하(慶事祝賀) 등을 학회 활동 사항으로 제시했다.
학회 활동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기관지 발행이었다. 대한흥학회는 기관지인 『대한흥학보(大韓興學報)』를 1909년 3월 20일 창간하여 월간으로 발행했다. 『대한흥학보』는 일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판매되어 유학생들뿐 아니라 국내 국민들의 민지(民智) 계발과 지식 보급에도 기여했다. 1910년 5월 제13호까지 발행된 후 폐간되었다.
대한흥학회는 이러한 활동 외에도 재해 구휼(救恤), 강습회 개설 등의 활동도 펼쳤다. 또한, 1909년 12월 일진회(一進會)가 합방상주문(合邦上奏文), 청원서 및 성명서를 발표하자 총대의원를 본국에 파견하여 일진회의 행위를 성토하고 비판했다. 이후 일본 당국은 일본 유학생들과 대한흥학회를 감시하고 탄압하였고, 결국 1910년 8월 28일 해산되었다.(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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