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일제 통감부에 의해 강제해산된 뒤 대한자강회의 고문이던 오가키(大垣丈夫)가 이토(伊藤博文)의 내락을 얻어 1907년 11월 10일 윤효정(尹孝定), 장지연(張志淵) 등 이전의 대한자강회 간부들과 천도교의 대표로서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등을 추가시켜 10명으로 대한협회를 조직했다.
“교육의 보급, 산업의 개발, 생명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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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일제 통감부에 의해 강제해산된 뒤 대한자강회의 고문이던 오가키(大垣丈夫)가 이토(伊藤博文)의 내락을 얻어 1907년 11월 10일 윤효정(尹孝定), 장지연(張志淵) 등 이전의 대한자강회 간부들과 천도교의 대표로서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등을 추가시켜 10명으로 대한협회를 조직했다.
“교육의 보급, 산업의 개발, 생명재산의 보호, 행정제도의 개선, 관민폐습의 교정, 근면저축의 실행과 권리, 의무, 책임, 복종의 사상을 고취”라는 7개 항목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1908년 4월부터 매월 『대한협회회보』를 발행해 국민들을 지도, 계몽했으나, 경비 부족으로 통권 12호로 종간했다. 회보는 매월 2,000부 이상 발행해 국내는 물론 중국·일본·미국에까지 보급했다. 회보발행소장은 홍필주(洪弼周), 편집 겸 발행인은 이종일이 맡았다.
대한협회는 본래 의도했던 주권수호 등의 정치적 활동은 수행하지 못하고 1910년 국권상실 후 해체되었다. (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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