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7월 대한유학생구락부(大韓留學生俱樂部)와 한금청년회(漢錦靑年會)가 민충정공추도조회(閔忠正公追慕弔會)를 마치고 통합에 합의하여 대한유학생회가 설립되었다. 회장에는 상호(尙灝), 부회장에는 최린(崔麟)이 선출되었다. 설립목적은 회원 상호 간의 친목 도모와 학식 교환, 그리고 서양문물을 수용해 국가실력을 향상하는 데 있었다. 유학생 통합단체로 출발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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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7월 대한유학생구락부(大韓留學生俱樂部)와 한금청년회(漢錦靑年會)가 민충정공추도조회(閔忠正公追慕弔會)를 마치고 통합에 합의하여 대한유학생회가 설립되었다. 회장에는 상호(尙灝), 부회장에는 최린(崔麟)이 선출되었다. 설립목적은 회원 상호 간의 친목 도모와 학식 교환, 그리고 서양문물을 수용해 국가실력을 향상하는 데 있었다. 유학생 통합단체로 출발한 대한유학생회는 계속 유학생단체의 통합운동을 전개하여 1908년 1월에는 낙동친목회(落東親睦會), 호남학계(湖南學契)와 통합해 대한학회(大韓學會)를 결성하며 전적으로 해산되었다.
대한유학생회의 회보인 『대한유학생회학보』는 1907년 3월에 창간되어 그 해 5월까지 월간으로 3호가 발간되고는 유학생단체의 통합문제와 관련하여 중단된 것 같다. 이 학보는 유학생만을 독자층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국내의 독자층을 고려하여 주한영서사(朱翰榮書肆)를 국내 판매소로 하고 있었다. 발행 부수가 1,000부였다고 한다. (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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