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농민을 대상으로 창간한 월간 잡지.
기독교의 장로교총회는 1928년 농촌부를 설치하고 1929년 6월 14일 평양에 있는 농민생활사에서 국판으로 창간호를 냈다. 이 잡지는 농민들에게 새로운 과학적 농사법과 품종개발의 소개를 주요 내용으로 하면서도 기독교의 진리를 전달하는 논설과 수필들을 많이 실었다.
미국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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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농민을 대상으로 창간한 월간 잡지.
기독교의 장로교총회는 1928년 농촌부를 설치하고 1929년 6월 14일 평양에 있는 농민생활사에서 국판으로 창간호를 냈다. 이 잡지는 농민들에게 새로운 과학적 농사법과 품종개발의 소개를 주요 내용으로 하면서도 기독교의 진리를 전달하는 논설과 수필들을 많이 실었다.
미국인 선교사 루츠(Lutz, D. N.)는 1920년에 입국해 평양을 중심으로 농촌 계몽운동에 주력하면서 농업 관계의 논문을 많이 발표했는데, 한국교회도 이 운동에 자극을 받아서 농촌선교와 농촌계몽에 힘썼다.
1931년 4월에 평양 숭실 전문학교의 농학강습소가 농과로 승격하고, 이 농과의 교수들이 농민생활지에 농업에 대해 많이 투고했다. 장로교총회의 농촌부는 각 노회 조직을 통해 이 잡지를 지역사회에 널리 보급했는데, 1932년 9월에는 월 3만 8,500부가 발매되었다.
이 잡지의 사명과 업무가 점점 증대되자 1934년부터는 발행권이 숭실전문학교로 이관되었고, 장로교총회 농촌부는 『농촌통신』을 월간으로 발행해서 지방농촌교회의 지도를 계속했다.
1942년 5월에 일제에 의해 선교사들이 추방된 뒤 조응천(曺應天)이 얼마 동안 『개로( 皆勞)』라고 개칭해 계속 간행을 도모했다.
광복 후 1953년 6월 서울에서 복간되었고, 1956년 5월부터는 발행소를 충청남도 대덕군에 있는 기독교 연합 봉사회로 옮겨 발행하다가 1968년 4월 1일 조응천이 다시 편집과 발행을 맡으면서 발행소를 서울로 옮겼다.
이 잡지는 발간 이후 수준 높은 농민 잡지로서 우리나라 농업의 근대화에 기여함은 물론 기독교의 전도와 지역사회 개발에 공헌했다.(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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