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의 선각자 유길준(兪吉濬)이 1889년 탈고, 1895년 출판한 근대국정개혁서.
이 책은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단순한 서구기행문이 아니라, 서구의 ‘근대’모습을 보고 우리의 근대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를 정치 경제 법률 교육 문화 등 각 부문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근대화 방략서’이라고 할 수 있다.
1888년 박영효가 지은 「조선국 내정에 관한 건백서」(『일본외교문서』21권, 292∼311면)에서 국정개혁 구상을 밝히고 있지만 그 분량과 내용의 심도에서 『서유견문』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서유견문』은 한국 최초의 체계적인 근대화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국한문혼용체로 556면. 갑오경장 기간 중인 1895년 일본의 교순사(交詢社)에서 간행. 현재 유길준전서편찬위원회에서 펴낸 『유길준전서』(일조각, 1971)전5권 중 제1권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1882년 여름 한국 최초의 일본 유학생으로 일본에 체류하던 중 구상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그는 일본이 30년 만에 부강을 이룬 원인이 서구의 제도와 법규를 모방한 것이 십중팔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서구의 진상을 알아야 되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조선정부가 구미제국과 조약을 맺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미 각국 등 바깥 세상에 대한 견식을 넓힐 목적으로 책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 그의 스승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지은 『서양사정』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일본국민의 개화 계몽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은 책을 써보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임오군란 발발을 계기로 서둘러 귀국, 작업이 일시 중단되었다가 실제 집필은 미국 유학 후 연금 기간 중인 1887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후 1883년 7월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報聘使)의 정사 민영익(閔泳翊)의 수행원으로 동행해 미국에 유학한 유길준은 1884년 갑신정변의 소식을 듣고 원래 계획했던 대학진학을 포기한 채 1885년 6월 귀국하였다. 그러나 귀국하자마자 포도청에 감금되고 두 달 만에 우포대장 한규설(韓奎卨)의 집에 유폐된다.
이는 갑신정변 후 청국이 적극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고 개화파를 탄압하고 있던 상황에서 그의 재능을 아낀 고종과 한규설 등이 그를 보호 활용하기 위해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1887년 가을, 민영익의 배려로 그의 별장인 취운정(지금의 가회동에 위치)으로 옮긴 유길준은 심적인 안정을 찾고 시간적 여유를 얻게되자 원고를 재정리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틈틈이 써 둔 원고 외에 각종 외국서적을 번역해 인용 또는 참고하였다. 특히 『서양사정』과 제목과 내용이 일치하거나 비슷한 점이 많은 점으로 미루어 이를 가장 많이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포셋(Henry Fawcett)의 『부국책』과 휘튼(Henry Wheaton)의 『만국공법』 등도 인용한 흔적이 보인다.
『서유견문』의 원고는 1889년 늦봄에 완성되었으나 여전히 연금 상태라 출판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1894년 갑오경장 기간 중 일본에 보빙사의 일원으로 가면서 원고를 가져가 후쿠자와가 설립한 교순사에서 발간하였다(1895년 4월25일).
그는 1000부의 책을 찍어 판매하지 않고 정부고관을 비롯한 당시의 유력자들에게 기증함으로써 자신이 주도하던 갑오개혁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홍보하는데 주력하였다.
전 20편으로 이루어진 『서유견문』은 크게 서론, 본론, 결론, 그리고 보론의 네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서론은 제1∼2편으로 세계의 지리를 기술하고 있다.
세계의 산·강·바다의 높이나 깊이 등을 포함해 지나치게 상세하리만큼 세계의 지리를 다루고 있는 이유는 한마디로 “세계는 넓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라는 웅변으로 읽혀진다. 개화 또는 근대화의 출발은 전통의 중국 중심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본론은 제3편 「방국의 권리」부터 14편 「상고의 대도」까지 이다. 여기에서는 국제관계·정치체제·인민의 권리·법률·교육·상업·조세·화폐·군대·종교·학술 등 각 분야의 근대적 개혁의 내용을 상술하고 있다.
결론은 제14편 뒷부분 「개화의 등급」이다. 여기에서는 개화의 개념과 그 방법론을 논하고 있다. 이 글은 당초에는 없었는데, 출판 직전, 갑오경장을 주도하는 시점에서 개혁의 구체적인 방법과 의지를 담아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제15편부터 제20편까지는 보론으로, 서양의 풍물을 소개하는 기행문이다. 혼례·장례·의복과 음식·오락·병원·교도소·박람회·증기차 등과 서양 대도시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부분은 거의 전부 후쿠자와의 『서양사정』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서유견문』에 나타난 유길준의 ‘근대화론’의 특징은 전통의 장점을 살리고 전통의 단점을 서구의 장점의 도입으로 보완하는 ‘취장보단(取長補短)’과 전통과 근대의 중용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하지만 유교의 오륜에 바탕 한 윤리 외에는 모두 변혁의 대상으로 간주함으로써 ‘동도서기론’과 구분된다.
1896년 국왕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유길준이 일본에 망명함에 따라 『서유견문』 역시 출간된 지 10개월도 채 안되어 자유롭게 유포되지 못하는 불운을 겪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유견문』은 시의에 합당해 쓰일만한 서적으로 인식되어 공립소학교 혹은 사립학교의 교과서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독립신문』·『황성신문』 등에 원문 그대로 인용되거나 그 논지가 실리기도 했으며, 이승만, 안창호를 비롯한 지식인 정치가 계몽운동가들에게도 탐독됨으로써 개화사상을 보급하고 개화운동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책의 또 하나의 특징은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해 한국의 문자생활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기존의 한문 위주의 문자생활이 일반인들에게 어려울 뿐만 아니라 중국 중심의 종속관계를 유지시키는 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우리 글인 한글 사용을 장려함으로써 국민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한편 중국으로부터의 자주자립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맥락에서 『서유견문』에는 중국의 연호가 아닌 조선의 개국연호를 쓰고 있다. 한글 보급을 확대하려는 그의 의지는 나중에 최초의 국어문법책인 『조선문전(朝鮮文典)』·『대한문전(大韓文典)』(1909)의 출판으로 이어졌다. (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접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