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李光洙)가 지은 기행수필. 1922년 3월∼8월까지 『신생활(新生活)』에 발표되었다. 1923년 시문사(時文社)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했고, 1979년 『이광수문학전집(李光洙文學全集)』9(又新社)에 수록되었다.
이광수는 ‘금강산유기 동기’(금강산유기 소재)에서 외국인들에 의한 금강산 기행과 사진첩이 나온 것을 말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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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李光洙)가 지은 기행수필. 1922년 3월∼8월까지 『신생활(新生活)』에 발표되었다. 1923년 시문사(時文社)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했고, 1979년 『이광수문학전집(李光洙文學全集)』9(又新社)에 수록되었다.
이광수는 ‘금강산유기 동기’(금강산유기 소재)에서 외국인들에 의한 금강산 기행과 사진첩이 나온 것을 말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이렇게 우리 중에는 우리의 천부(天賦)의 보물이 소개되지 못하였나이다. 4·50년을 두고 금강산을 그리워하는 나로서는 이에 대한 지식을 얻을 것이 없었읍니다. 만일 우리가 금강산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었을진대 우리의 제매(第妹)와 자녀들이 보통학교를 마치기 전에 벌써 금강산의 위치, 명소의 배체와 명칭, 그 사진과 화첩, 그 시와 노래를 보고 외웠어야 할 것입니다. …… 이에 나는 이 부족하나마 내 손으로 우리 금강산을 우리 조선 사람 중에 소개해 보자는 야심을 발하였읍니다. 나의 사랑하는 제매들에게 금강산이 어떻게 아름다운 맛을 알리고 아울러 금강산 구경 노차(路次)나 알려주어 나와 같은 설움을 당하지 말자 하자 하였읍니다. 그러나 이상이 말한 것보다는 더욱 중요한 동기라 할 만한 것은 위대 장엄한 자연 속에서 내 영혼의 세례를 받자, 지리멸렬한 내 인격의 통일을 얻어 보자, 직접으로 천공(天公)의 계시를 들어 나의 일생의 진로를 정하자 함이외다.”라고 금강산행의 동기를 분명히 하고 있다.
「금강산유기」는 그 여정에 따라 ‘남대문에서 고산(高山)에’에서 출발하여 고산역-철령관(鐵嶺關)-장안사, 영원동(靈源洞)-만군대(萬軍臺), 만폭동, 백운대-선암(船庵)-수미암(須彌庵), 선암, 수미암, 비로봉(毘盧峰), 온정령(溫井嶺), 만물초(萬物草), 구룡연(九龍淵), 보광암(普光庵)-동석동(動石洞), 유미사(楡嵋寺), 은선대(隱仙臺), 미륵봉(彌勒峰)-중내원(中內院), 안무재, 백탑동(白塔洞)을 답사하면서 영혼을 정화한다.
자연의 숭고함과 경이로움 속에 불사와 인간의 접목을 자연의 경취에 융합하여, 영산(靈山) 금강산의 절경과 그 신비를 섬세한 필치로 표출하고 있다.
이 기행문은 명산 고적의 순례기인 최남선의 「심춘순례(尋春巡禮)」나 정감적이고 감탄조인 정비석(鄭飛石)의 「산정무한(山情無限)」과는 달리, 격조어린 정감과 불교의 이치를 투영하여 금강산의 절경과 그에 깃든 심오한 영혼의 소리를 박진한 필치로 표출하고 있다.
「금강산유기」는 「오도답파여행」(1939), 「남유잡기」(1937)와 같이 이광수의 대표적인 기행문이며,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기」와 현진건의 「경주기행」, 이병기의 「낙화암을 찾아서」와 같이 기행수필의 4대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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