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찬식의 『추월색』은 아리따운 여학생이 칼에 찔리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추행에 저항하다 공격당한 여학생이 쓰러진 사이 범인은 도망치고, 한편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웬 청년 신사가 범인으로 체포된다. 이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한데 범인이 여학생 가슴을 움켜쥐고 접문례(接吻禮)를 시도하는 등 묘사는 잔뜩 선정적이고, 게다가 배경은 일본 우에노(上野) 공원이다.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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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찬식의 『추월색』은 아리따운 여학생이 칼에 찔리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추행에 저항하다 공격당한 여학생이 쓰러진 사이 범인은 도망치고, 한편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웬 청년 신사가 범인으로 체포된다. 이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한데 범인이 여학생 가슴을 움켜쥐고 접문례(接吻禮)를 시도하는 등 묘사는 잔뜩 선정적이고, 게다가 배경은 일본 우에노(上野) 공원이다. 여학생은 우에노 공원 한복판에 조성된 연못 불인지(不忍池)에 걸린 관월교(觀月橋)에서 범인과 맞닥뜨렸던 것이다. 범인은 양복에 금테 안경 쓰고 금시계줄까지 늘어뜨린 호화로운 차림새인데, 평소 여학생에게 구애하던 중 상황이 뜻같지 않자 추행과 폭력까지 불사한 듯하다. 그러나 당장의 사정을 밝히는 것은 다 미뤄두고 『추월색』은 10여 년 전 조선땅으로 돌아간다. 의식을 잃은 여학생이 병원에 누워 있는 사이다. 이때까지 익명으로 처리된 세 젊은 남녀의 극적 사연은 이런 서사적 조작에 의해 조금씩 밝혀지게 된다.
18판이나 나온 당대의 베스트셀러
『추월색』은 1912년 처음 출간됐을 때부터 1923년에 증판(增版)을 마감할 때까지 무려 18판을 발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당대의 베스트셀러다. 같은 무렵 출판된 활자본 구소설이 잘 팔릴 경우 4·5판, 이해조 작품 중 가장 잘 팔렸다는 신작 구소설 『옥중화』며 『강상련』이 12·13판에 그쳤다니까 『추월색』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그 인기의 첫 번째 끄트머리는 어느 모로 보나 그때까지의 신소설과 다른 『추월색』의 파격적 서두에 있었을 법하다. 감각적이다 못해 선정적인 묘사는 『추월색』이 확보하고자 한 대중성이 1900년대의 신소설과는 다른 층위에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혈의루』에서 시작된 1900년대의 신소설 역시 젊은 여성의 방랑과 성적 수난을 즐겨 다루었으나 그 최종 심급에는 국가의 문명화며 여성 교육 같은 명분이 자리해 있는 것이 통례였다. 『추월색』은 그런 특징을 벗어나 흥미와 통속성이 그 자체 자율적 표지가 된 단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남녀 간 결연의 문법에서 새로운 징후를 나타낸다는 점도 흥미롭다. 『추월색』의 주인공 정임과 영창은 아버지들의 결정에 따라 어린 나이에 정혼한 사이다. 옆집에서 엇비슷한 처지로 살면서 성미까지 비슷한 소꿉친구 사이기도 하다. 영창의 아버지 김승지가 초산 군수로 부임하게 되었을 때 이들 소년소녀가 이별을 맞이하는 장면은 자못 애틋하다. 정임은 339번지라는 주소를 영창에게 각인시키려 애쓰면서 편지할 것을 당부하고, 영창도 차마 발을 떼기 힘들어한다. 훗날 영창 가족이 민란으로 인해 실종되고 나서 정임이 “부모가 나를 이왕 영창에게 허락하셨으니 나는 죽어 백골이 되어도 영창의 아내”라고 다짐하는 것은 이런 어린 시절의 애정 때문이기 쉽다. 영창에 비해 시종일관 애정에서 더 적극적이었던 정임은 그것을 지키는 데도 더 결연하다. 그러나 정임에게 이런 애정을 발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라는 전근대적 도덕률밖에 없다. 이 때문에 정임은 아버지 이시종과 다소 기묘한 충돌을 한다. 개화파 이시종이 정혼을 무효화하고 정임을 딴 데 결혼시키려 하는 반면 정임이 더 보수적으로 정절이라는 도덕률을 고수하는 것이다.
드레스와 프록코트 차림으로 떠난 만주 신혼여행
마침내 정임은 가출까지 불사해 일본으로 향한다. 도중에 약간의 성적 수난을 겪지만 일본옷으로 갈아입은 후에는 수난도 사라진다. 소설의 첫 대목 우에노 공원 장면에 등장할 당시 정임은 갓 학업을 마친 상태이며, 영창과 헤어진 지 이미 9년이 경과한 무렵이다. 이쯤에서 『추월색』은 애초의 범죄 장면으로 돌아가 정임을 구원하려던 낯선 청년이 바로 영창임을 알려준다. 민란 후 부모와 헤어지고 유랑하던 영창은 영국인 문학박사 스미스를 만나 이후 영국에서 성장하면서 그 자신 문학사가 되어 있는 처지다. 이제 정임을 겁간하려던 불량 청년 강한영이 처벌받는 반면 남녀 주인공은 행복한 결합을 이룬다. 『추월색』은 이에 덧붙여 정임과 영창이 각각 드레스에 프록코트 차림으로 기차를 타고 만주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악수례(握手禮)’로 행한 결혼식도 신기한 것이었지만, 이국적 차림새에 신혼여행이라는 새 관습은 더더구나 당시 독자들 눈에 낯설면서도 흥미로웠을 것이다. 제국 일본이 경영하기 시작한 만주에서 신혼부부가 영창의 부모와 재회하는 것이 『추월색』의 대미(大尾)다.
『추월색』은 일본인이 발행한 『조선일일신문(朝鮮日日新聞)』 한글판에 연재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구체적 정황은 아직까지 밝혀진 바 없다. 최찬식의 아버지로 마지막 여항시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최영년이 일본인 신문 『대한일보』와 『조선신문』에 관여했고 최찬식의 동생 원식 또한 『조선신문』에 근무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최찬식과 『조선일일신문』의 관련은 개연성이 높다. 그러나 실제 확인 작업에서는 『추월색』의 연재 실물은 물론 『조선일일신문』에 대한 검토도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다. 『추월색』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 연재 당시가 아니라 단행본 출간 이후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단행본으로서 『추월색』은 가장 오래된 근대 출판사로 꼽히는 회동서관에서 간행된다. 소문난 베스트셀러였던 만큼 회동서관의 재정적 안정에도 기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복각본은 1912년에 발행된 초판으로, 출판사 사장이었던 고유상이 저작 겸 발행자로 적혀 있다. 우에노 공원의 불인지(不忍池) 풍경을 담고 있는 표지는 원근법을 인상적으로 채용한 구도다. ‘애옥(愛玉)’이라는 낙관(落款)이 보이지만 화가가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해제: 권보드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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