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12월에 창간된 문학월간지로 순수문예를 지향했다. 이주홍(李周洪)과 홍구(洪九)가 편집을 맡았고, 편집인 겸 발행인은 홍순열(洪淳烈)이었다. 풍림사(風林社)에서 발행했고, 컷·장정·표지는 이주홍이 맡았다. ‘순문예 중심으로써 깨끗한 정기물(定期物) 한 개를 갖고 싶다’며 의욕적으로 출발했으나 1937년 5월 6호를 끝으로 종간되었다. 193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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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2월에 창간된 문학월간지로 순수문예를 지향했다. 이주홍(李周洪)과 홍구(洪九)가 편집을 맡았고, 편집인 겸 발행인은 홍순열(洪淳烈)이었다. 풍림사(風林社)에서 발행했고, 컷·장정·표지는 이주홍이 맡았다. ‘순문예 중심으로써 깨끗한 정기물(定期物) 한 개를 갖고 싶다’며 의욕적으로 출발했으나 1937년 5월 6호를 끝으로 종간되었다. 1937년 5월에 수록된 정청산(鄭靑山)의 「의원(醫員)」 끝부분에 ‘전편(前篇) 종(終)’이라는 표현이 부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계속 발간할 예정이었으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종간한 것으로 보인다.
『풍림』은 비록 100면 내외의 두껍지 않은 문학월간지였으나 매호 문제적인 기획으로 전형기적 상황 때문에 혼란에 빠져 있던 한국문학의 새로운 방향성을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예컨대 안회남, 최인준, 김유정, 강노향, 박영준이 필진으로 참여한 ‘새로운 문학은 무엇을 목표로 할까?’와 유진오·이기영·채만식으로 채워진 ‘문학청년에게 주는 글’이라는 창간호의 기획, 김유정·김동리·박향민·방인희·안회남·박영준·김소엽·현경준이 참여한 3호의 ‘신인들의 직언’ 특집, 그리고 이동규·정비석·김동리·홍구·박영준 등의 신진작가들이 이광수·한설야·유진오·이효석·이태준 등 앞선 세대의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분석한 4호의 ‘작가론특집’, 그리고 박아지·신석정·오장환·김광균·윤곤강 등의 신진 시인들이 박세영·정지용·이은상·백석·김기림·임화 등의 시세계를 논한 5호의 ‘시인론특집’, 마지막으로 이동규·김우철·계용묵·정비석 등의 신인작가들이 임화·최재서·이원조·백철 등의 비평세계를 조명한 6호의 ‘평론가특집’ 등이 각기 기획되었는데, 이 기획들은 1930년대 중·후반의 한국문학의 현재를 조망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데 의미 있는 디딤돌 역할을 하였다. 이외에도 2호에 실린 임화의 「진보적 시가의 작금(昨今)」, 이기영의 「『고향』 세평(世評)에 대하여」, 3호에 실린 한설야의 「문단주류론」, 5호에 실린 임화의 「문학이론으로서의 신휴머니즘에 대하여」, 6호에 실린 김남천과 박승극의「이기영 검토」 등의 글 역시『풍림』이 한국문학사에 남긴 기억할 만한 기여라 할 수 있다.
『풍림』이 한국문학에 남긴 가장 큰 흔적은 무엇보다 1930년 중후반의 한국문학의 ‘작금(昨今)’을 수시로 비교, 분석하고 맥락화함으로써 혼란기에 처한 한국문단 전반에 의미 있는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1936년과 1937년 당시만 해도 문학적 역량이나 가치가 충분히 증명되지 않은 소위 신세대 작가들의 목소리를 어느 매체보다도 앞서서 수용하는 적극성을 보여 이후 김동리·정비석·오장환·이육사 등 1930년대 후반기를 풍요롭게 한 신세대 작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도 『풍림』의 중요한 의의라 할 수 있다. (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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