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공개되는 『조선체육계』 제3호
일제 강점기에 거의 10년 터울로 발행된 같은 이름의 다른 체육전문잡지가 있다. 바로 『조선체육계』다. 편의상 먼저 발행된 『조선체육계』를 ‘조선체육계 1’, 뒤에 발행된 『조선체육계』를 ‘조선체육계 2’로 표현하자.
『한국잡지백년』(최덕교 편저, 현암사, 2004) 제2권에 실린 이들 잡지에 대한 설명을 보면 ‘조선체육계 1’은 우리나라 최초의 체육잡지로 1924년 10월 15일 ‘제3종 우편물 인가’를 받았다는 기록만 있을 뿐 1호와 2호는 없고, 1925년 2월 25일자로 발행된 제3호만 있을 뿐이라고 되어 있다. 통권 몇 호가 나왔는지는 미지수다. 또한 1호와 2호가 정확하게 언제 발행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3종 우편물 인가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1924년 10월이나 11월에 창간된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제3호의 표지는 스타트라인에서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는 미국 육상 선수 잭슨 볼니 숄츠를 모델로 하고 있다. 숄츠는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 400m 릴레이에서 금메달을 딴 스프린터였다. 편집 및 발행인은 도쿄유학생으로 독립운동을 한 선우전, 인쇄 노기정, 인쇄소 한성도서(주), 발행소 조선체육계사(경성부 견지동 31) 발행으로 되어 있다. 수록내용은 제8회 파리올림픽 우승자 화보를 비롯해 조선체육회의 과거 및 장래 사명, 조선체육회 취지서 및 발기인, 임원 명단 등 다양한 자료들을 수록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아쉽게도 이 정도일 뿐 제3호의 구체적인 수록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체육계 2’는 ‘조선체육계 1’이 나오고 난 뒤 9년이 지난 1933년 7월 1일 조선체육회 발기인이자 초대 7명의 이사 가운데 한 사람인 이원용이 발행했다. ‘조선체육계 2’도 통권 2호에서 종간되고 말았다. ‘조선체육계 2’ 창간호는 네트를 앞에 두고 6명의 남자 정구 선수들이 서 있는 모습을 표지로 하고 있다.
‘조선체육계 2’는 잡지가 온전히 남아 있지만 이번에 재단법인 아단문고에서 ‘조선체육계 1’ 제3호를 공개하기 전까지 ‘조선체육계 1’은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과문(寡聞)한 탓일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체육계 1’의 ‘제3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그 베일을 벗는 셈이다. 또한 처음으로 ‘조선체육계 제3호’의 속살이 공개되는 만큼 지금까지 조선체육회에 대해 알려졌던 내용과는 달리 한국체육사를 재정립해야 할 만한 내용들도 포함하고 있어 상당한 충격파가 예상된다.
창립취지서와 창립발기인 다시 쓰여야
조선체육회 창립취지서는 1984년 이학래 한양대학교 예체능대학장이 국회도서관에 보관 중이던 1934년 『신동아』 3월호에서 발굴했다. 당연히 『대한체육회사』(1965년 5월 발행), 『대한체육회 50년』(1970년 7월 13일 발행)에는 수록되지 않았으며 『대한체육회 70년사』(1990년 12월 발행)에 현대문으로 고쳐서 처음으로 나온다. 『대한체육회 90년사』(2010년 12월 발행)에는 『신동아』 3월호에 실렸던 창립취지서 원문이 함께 실려 있다.
하지만 이 창립취지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앞 뒤 문맥에서 약간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 최고 석학 가운데 한 명으로 문장가였던 동아일보 주필 설산 장덕수가 썼다고 믿기에는 뭔가 어색한 표현이 눈이 띈다. 고어를 현대식으로 고쳐 쓴 것은 그렇다고 해도 바로 둘째 문장의 총동(總動)이란 용어도 생소하고 도입부의 문맥도 뭔가 어색하다.
이것이 이번 ‘조선체육계 1’의 제3호에서 발견된 조선체육회 창립취지서로 완전히 의문이 풀렸다. 지금까지의 조선체육회 창립취지서의 총동은 약동(躍動)이었으며 도입부에는 아예 한 문장이 빠져 있었다. 편의상 1934년 『신동아』 3월호에 실려 있던 창립취지서 도입부와 ‘조선체육계 1’ 제3호에 수록된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보라 半空에 소슨 푸른 솔과 大地에 이러선 높은 山을! 그 얼마나 雄雄하며 毅毅한고! 天地에 흐르는 生命은 과연 總動하는 도다. 보라! 空中에 나는 빠른 새와 地上에 기는 날랜 짐생을! 그 얼마나 强健하며 敏捷한고. 天地에 흐르는 生命은 과연 雄壯하도다.”(『신동아』 1934년 3월호)
“보라 半空에 소슨 푸른 솔과 大地에 니러선 놉흔 山을! 그 얼마나 雄雄하며 毅毅한고! 天地에 흐르는 生命은 과연 躍動하는 도다. 보라! 空中에 나는 ㅽㅏ른 새와 地上에 기는 날랜 김생을 그 얼마나 剛健하며 敏捷한고? 天地에 흐르는 生命은 과연 充實하도다. 보라 蒼空에 빗나는 붉은 해와 虛空에 도는 크고 넓은 ㅼㅏ을 그 얼마나 壯烈하며 健健한고? 天地에 흐르는 生命은 果然 雄壯하도다.”(『조선체육계』 1924년 3월호)
이처럼 아예 한 문장(붉은 글씨)이 빠져 있는 바람에 전체 문맥이 어색했던 것이었다. 이밖에도 지면 관계상 모두 옮길 수는 없지만 위에서 보듯 여러 군데에서 다른 곳이 많이 발견된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두 가지 창립취지서 가운데 과연 어떤 것이 더 정확한가에 대한 논란은 사실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창립취지서가 게재된 잡지의 발행된 시기로 보아 조선체육회가 창립되고 난 뒤 4년을 갓 넘긴 ‘조선체육계 1’ 제3호에 실린 것이 14년이 지나 게재된 ‘『신동아』 3월호’보다는 더 정확하리라는 심증뿐만 아니라 전체 문장의 문맥으로 미루어도 명확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앞으로 상당히 논란이 될 가능성이 높은 부분은 창립발기인 명단이다. 지금까지 창립발기인은 모두 96명으로 이 가운데 3명은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고 93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체육계 1’ 제3호에 실린 발기인은 모두 90명이었고 이 가운데 50여명이 지금까지 알려진 창립발기인과 달랐다. 1~2명이면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거의 반 이상의 발기인이 다르다는 것은 대단한 논란거리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문제는 현재 창립발기인으로 되어 있는 93명은 모두 직업이 밝혀져 있으나 조선체육계에 실린 90명은 직업이 알려지지 않아 확인 작업이 상당히 어렵다는 점이다. 이들이 당시에는 모두 명망 있고 신지식인들이겠지만 이들 인물에 대한 자료 부족과 동명이인이 많아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다. 앞으로 더욱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두 건의 조선체육회 회칙 발견
조선체육회는 1920년 7월 13일 창립되어 1938년 7월 4일 일제의 강압에 강제 해산될 때까지 만 18년 동안 우리나라 체육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이 동안 10대를 거치면서 9명의 회장과 위원장이 살얼음판을 걷듯 일제에 직접적인 항거를 하거나 때로는 타협을 하면서 조선체육회를 이끌어 왔다.
또한 조선체육회는 회장제로 시작해 1924년 7월 1일 제4대에 들어서 위원장제로 바뀌었고 다시 4년이 지나 1928년 8월 18일부터는 회장제로 환원되는 등 회장제-위원장제-회장제로 직제 개편이 이루어졌으며 덩달아 회칙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조선체육회 창립총회 회칙은 이중국이 작성하고 배재고보 교무주임으로 이중국의 형인 이중화가 교열을 맡았다. 모두 35조로 된 규약(회칙)을 발기인이자 변호사인 이승우가 1920년 7월 13일 서울 종로 태화정서 열린 창립총회에서 낭독해 만장일치 승인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창립총회 회칙은 물론이고 직제개편에 따라 개정된 회칙도 그 전문(全文)은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었다. 대한체육회는 물론이고 한국체육역사학회를 비롯해 그 어디에서도 조선체육회 회칙은 본 적이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즉 조선체육회 직제 개편에 따라 회칙의 일부 단편적인 내용들이 『동아일보』나 『대한매일신보』의 보도로 알려져 있을 뿐 광복 이전의 조선체육회 회칙 전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전인미답의 고지나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재단법인 아단문고의 도움으로 발견된 조선체육회 회칙은 모두 2건이다. 첫 번째는 ‘조선체육계 1’ 제3호에 실려 있는 회칙이며 또 다른 하나는 1931년 5월 9일에 개정된 회칙이다. 첫 번째 회칙은 조선체육회가 1924년 7월 1일 회장제에서 위원장제로 바뀐 뒤의 회칙으로 모두 제10장 제28조로 되어 있다. 두 번째는 1931년 5월 9일 제12차 조선체육회 총회에서 이사 임원의 임기를 2년, 총회를 매년 5월에 열기로 하고 이사를 30명으로 늘인 뒤의 회칙으로 제6장과 부칙을 포함해 모두 23조로 되어 있다.
이번에 발굴된 두 가지 조선체육회 회칙은 조선체육회 정기총회가 끝난 뒤 『동아일보』나 『매일신보』 등을 통해 보도된 기사 내용과 일치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진본으로 여겨져 앞으로 조선체육회의 전반적인 기구나 규모를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야구규칙과 육상규칙도 연구 가치 높아
‘조선체육계 1’ 제3호에는 이밖에도 눈여겨 볼 대목들이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5페이지에 걸쳐 기술된 최신야구규칙과 3페이지에 걸쳐 기술한 육상경기규칙이다.
조선체육회는 창립 첫 사업으로 1920년 11월 4일부터 사흘 동안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열었다. 오늘날 전국체육대회 효시인 전조선야구대회는 전일본중등학교야구우승권대회(일명 고시엔대회)에서 사용한 야구규칙과 대회요강을 우리말로 번역해 적용했다. 1999년 3월 20일 발행한 『한국야구사』(201~202쪽)에는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에 사용한 대회요령, 경기규칙, 심판규정이 나와 있으나 요즘의 대회요강 정도로 간단했을 뿐 실제의 야구규칙은 보이지 않는다.
육상은 이보다 한참 늦었다. 육상은 일본인들의 단체인 조선체육협회가 주최한 조선신궁대회에 우리 선수들이 참가했고 조선체육회는 1924년이 되어서야 제1회 전조선육상경기대회를 개최했다. 『한국육상경기 100년사』(2013년 6월 15일 발행)에 따르면 조선체육회는 본격적으로 육상경기대회를 열기 위해 1923년 7월 4일 제4차 정기총회에서 육상경기연구위원회를 구성하고 육상경기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를 시작해 1924년 5월 10일 원달호가 ‘육상경기규칙’을 편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조선체육계 1’ 제3호에 최신야구규칙을 집필한 전의용은 도쿄유학생 출신 야구선수로 1923년 6월에 창립한 조선야구심판협회 심판원이며 육상경기규칙을 쓴 원달호는 조선체육회 창립발기인으로 연희전문학교 교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최신야구규칙이나 육상경기규칙은 조선체육회가 주최하는 야구대회와 육상대회에 적용한 규칙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따라서 이 또한 더없이 중요한 사료(史料)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들 야구규칙이나 육상규칙 이외에도 야구에서 ‘사인은 몇 가지나 사용할까’ ‘야구선수의 어깨 양생법’이나 육상에서 ‘단거리 경주의 요건’ ‘영미 주자의 주법’ 등은 나름대로 현대와 비교해 연구해 봄직한 내용들이다.
문화재적 가치 높은 체육계의 보물
문화재청은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유물(제489호), 19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후원권(제490호), 이원순 유물(제491-1. 2호), 런던올림픽 참가페넌트(제492호)를 비롯해 전조선야구대회 청년단 우승기(제498호), 전국체육대회 우승기, 2위, 3위기(제499호), 연덕춘 골프채(제500호), 새미리 수영복(제501호) 등 다양한 품목들을 2012년 체육 문화재로 등록했다.
이번에 첫 선을 보인 ‘조선체육계 1’ 제3호는 지금까지 존재한다고 알려지기는 했지만 실제로 잡지가 모습을 보인 것은 최초여서 위에 열거한 체육 문화재 못지않은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조선체육계 1’ 제3호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들이 지금까지 알려졌던 우리나라 근대 체육사의 근간을 바꿀 수도 있다는 점에서 단순하게 문화재 이상, 즉 ‘대한민국 체육계의 보물’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감히 단언한다.
앞으로 ‘조선체육계 1’ 제3호의 원본을 통해 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수록된 내용들은 대한체육회나 한국체육을 연구하는 학자나 학도들은 반드시 정독(精讀)해야 할 귀중한 자료들이다. (정태화, 한국체육 100년사 편찬위원․(사)한국체육언론인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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