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5월 25일 피난지 부산에서는 공비 소탕이라는 명목 아래 대통령 직선제 및 상·하 양원제를 강행하기 위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야당 국회의원 수십여 명이 타고 있는 통근 버스가 통째로 헌병대로 연행되었고, 국회를 규탄하는 백골단과 땃벌떼, 민중자결단 등의 온갖 관제 데모와 테러가 연일 광장을 점령하는 와중에 개정헌법이 통과되었으며, 그 결과 8월 5일 이승만이 재선에 성공했다.
이른바 ‘부산 정치 파동’으로 불렸던 소란스러웠던 이 시기 국회에서 피난 온 문화예술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또 다른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으니, 바로 ‘문화보호법’의 제정이다(1952년 8월 7일). 학술과 예술의 국가적 대표 기관에 해당하는 학술원·예술원 설립을 핵심으로 하는 이 법은 처음 상정될 당시부터 문화인들의 큰 기대와 관심을 끌었다. 기본적인 생계조차 막막했던 피난 생활에서 국가의 보호와 원조는 어느 때보다 절실했기 때문이다.
자유예술인연합 조직해 ‘문화보호법’에 대응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단체가 ‘자유예술인연합’이다. 지금껏 자유예술인연합은 막연하게 전쟁 이전 존재했던 예술위원회(1949년 1월)의 연장으로 추정되거나, 그 기관지 자유예술은 전후 창간된 문예지 자유문학의 전신쯤으로 추정되어왔다. 필자가 아단문고에 소장된 자유예술의 원문을 직접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 연합은 1952년 6월 5일 부산에서 창립되었는데, 문화보호법이 국회에 상정된 것이 1952년 6월 6일이니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 신속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자유예술인연합 발기인들은 6월 28일 부산에서 창립 결성대회를 개최했고, 이 대회에서 임원 선거를 한 결과 총장 김광섭, 부총장 유치진, 양주동, 사무국장 김송, 사무국차장 박기준, 고문 염상섭, 윤백남, 이헌구, 현제명, 이은상, 그 외 상임위원 12명 등이 선출되었다. 회원은 “예술의 전 영역에 참가하는 모든 양식(良識)의 문화인으로서 회원 5명 이상의 추천을 받은 자”를 자격으로 했으며, 총 91명에 해당하는 명단은 아래와 같다.
“오상순 노천명 김광섭 김경린 박기준 윤백남 최태응 조영암 안수길 김규동 전창근 양명문 박인환 공중인 유주현 김용직 윤금숙 윤영춘 박연희 유계선 강소천 최은희 조풍연 최인욱 박태현 윤고종 백철 김세종 임원식 김상화 이건혁 박성환 양주동 이은상 최독견 이상춘 박영준 구상 박용덕 백영수 김팔봉 박남수 염상섭 유치진 이진형 장수철 김흥수 김성민 윤석중 권옥연 조흔파 조병화 임진수 한형석 김종문 안종화 김태현 최성진 강영수 이봉래 하승균 김내성 이무영 장호강 이영순 정재인 김훈 이준 박귀송 조영식 임만섭 이봉구 이상범 김천애 김송 고봉인 임긍재 김순애 안종화 김해연 양병식 박계주 변관식 이인석 임옥인 김찬의 윤극로 최요안 한승권 김중희 이순보”
이들은 1952년 6월 30일에서 7월 1일에 걸쳐 ‘자유예술제’를 개최했으며, 7월 20일 유네스코 및 세계예술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송하고 문화대책 방안을 당국에 전달했다. 또한 8~10월 내내 회원들의 종군 활동과 관련해 자체적으로 보고회를 개최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여나갔다.
문총 및 문협과의 차별화 시도
자유예술인연합의 기관지 자유예술(1952년 11)에 실린 총장 김광섭의 발간사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정치 파동기라는 격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의식하는 가운데, “문학예술 전반에 걸친 하나의 종합성을 띤 단체”를 천명하고 나선 대목이다. 이를 위해 이들은 기존의 문화예술 분야의 대표 단체의 역할을 자임해왔던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 및 한국문학가협회(문협)와 분명하게 차별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단기 4280년(1947년) 2월에 이르러 29개의 문화단체를 망라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가 결성되어 좌익의 전국문화단체총연맹과 대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투쟁은 민주주의 방식에 의해 많은 산하 단체의 획득을 일삼게 해 ‘문총’의 29개 단체 속에는 지리학회, 생물학회, 체육회, 천문학회 등까지 포함되게 되어 그 후 정비는 되었으나 현재에 있어서도 문총은 문화일반에 걸친 광범한 문화단체를 가지고 있는 만큼 그것은 순문학이나 순예술 단체를 망라한 것은 아니다. 문학으로서는 한국문학가협회가 민국정부수립 후 보도연맹의 문인 등을 포섭하면서 결성되었으나 지난 8월 10일 문학대회에 대의원을 보내기 위한 형식적인 중집(中執, 회원들로 이루어진 모임 – 인용자)이 있었을 뿐으로 실상은 한 일도 없고 기록도 없고 누가 임원인지도 분명치 못한 공소한 한국문학가협회일 뿐으로서 규약도 없거니와 반공 이외의 문학적 어떤 슬로건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발간사에서 김광섭은 해방기 좌익에 맞서 결성되었던 문총과 문협의 의의를 언급하면서도, 현재 시점에서 이 단체들이 지니는 한계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문총의 경우 산하 단체가 지나치게 광범위해서 순문학, 순예술 단체로서의 성격이 약하다는 것과, 그 산하 단체들 가운데서도 중심을 자처해왔던 문협은 전쟁 이후 사실상 활동을 중단했고, 그 구성 역시 공소해 피난한 예술가들을 총괄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이는 1951년 중순경부터 문총의 해체설이 대두되어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자유예술의 구성을 살펴보면, 시(6편), 소설(6편), 평론(3편), 종군기(1편), 전시 문단 개관 및 영화계 관련 글(각1편), 그리고 잡문(2편)으로 일견 전형적인 문예지의 구성을 띤다. 그러나 부록으로 실린 「선언문」이라든지, 「헌장」, 「유네스코와 세계 자유예술인에게 보내는 메시지」, 「정부와 국회에 보내는 메시지」, 「건의서」, 「연합일지」 등은 이 잡지가 문학인들이나 문학애호가를 대상으로 한 일반적인 문예지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기관지로서의 성격이 강조되고 있다.
또한 ‘정책위원회 문화언론분과위원회’에 대한 건의서에서 알 수 있듯, 정부와 국회를 강하게 의식하는 면모를 보인다. 건의서에는 1) 예술원, 학술원의 조속 실현을 위시해, 2) 문화관 설치, 3) 반공문화극장의 설치, 4) 문화인의 해외파견, 5) 문화상 제도 창설, 6) 국립 촬영소 설치, 7) 외국 문화재의 합리적 유입, 8) 저작권의 경제적 옹호, 9) 외국 밀유입 불량 서적 단속 강화가 제안되어 있다. 이외 잡문에 해당하는 「문화제언」조차 문화인들의 현실에 입각한 문화정책을 당국에 확립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강행된 예술원 선거와 문협의 재기
그러나 자유예술의 창간호가 종간호가 된 데서 알 수 있듯, 이들의 목소리가 정부에 제대로 관철되었던 것 같진 않다. 문교부에서는 자유예술인연합과는 상관없이 문화인들의 직접 선거를 통해 예술원 회원을 선출하도록 했고, 예술원창설준비위원회(1952년 1월 4일)에서는 전체 문화인들을 유권자로 등록시키는 ‘문화인등록령’을 대통령령으로 공포했다(1953년 4월 14일). 1953년 5월부터 1954년 1월에 걸쳐 문교부에서 문화인 등록이 이루어졌고, 예술가들의 경우 등록된 문화인들에 대한 예술가자격심사위원회에서의 최종 심사를 거쳐 유권자가 확정된 뒤, 전국적인 선거가 시행되었다(1954년 3월 25일). 그 결과 문학 부문에서는 염상섭, 박종화, 김동리, 조연현, 유치환, 서정주, 윤백남이 당선되었으며(1954년 4월 6일), 1954년 7월 17일 예술원이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자유예술인연합 회원들의 경우에는 형식적인 고문으로 이름이 올라있던 염상섭과 윤백남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선출되지 못했다. 전쟁 책임으로 궁지에 몰렸던 이승만 정권이 직선제 개헌을 통해 재선에 성공했듯, 문화인들의 직접 선거 과정을 통해 피난지에서 위축되고, 위태로운 지위에 처해있던 문협 계열 문인들은 재기에 성공한 셈이다.
자유예술 같은 다양한 사료 발굴되어야
선행연구들에서는 문화보호법과 예술원 문제에 관해 문화예술인들이 국가의 정책을 수동적으로 추수한 측면을 주로 논의해왔다. 특히 예술원의 멤버이자 수혜자였던 조연현의 「학예술원 성립의 현실적 배경: 그 조직 경위와 반대 여론의 분석」(현대문학, 1955년 2월)이나 내가 살아온 한국문단: 문단측면 회고록(현대문학사, 1968) 등과 같은 한정된 사료만을 참고해 문화인들의 문제 제기나 반응이 문화보호법의 수속과 절차상에 그칠 뿐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없었다고 보았다. 오히려 피난지 문화예술계의 전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자유예술인연합 멤버들은 문총의 분열을 획책하고, 예술원 선거 결과에 불복하며 항의하는 소동을 일으키는 자들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자유예술의 존재가 증명하듯, 실제로는 국가가 전시 피난지에서 문화보호법이라는 명목 아래 예술원이라는 중앙집권적 조직을 새로 만들려 했던 시기에 다수의 문화인들이 안팎으로 유명무실해진 문총 및 문협에서 분리해 나와 자유예술인연합이라는 새로운 조직을 독자적으로 갖추고, 예술원 문제에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대응하려 했던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자유예술을 통해 예술인들의 민주적인 목소리를 모으고, 이를 정부에 전달하려 했다.
이 외에도 비슷한 시기 평론가 김석영이 문화인 보호라는 명목 아래 예술원이 문화인들로 하여금 법 자체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검토 없이 문단 정치를 조장케 한다는 점을 지적했고, 비슷하게 백철 역시 또 하나의 중앙집권적 예술 조직은 필요치 않음을 들었으며, 이봉구의 경우 절차와 국가가 문화인 자격을 흡사 말단 관리처럼 심사한다는 데 대한 거부감과 이미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문화예술인들을 경력이나 학력으로 판단하겠다는 지극히 관료적인 발상을 지적하는 등 다양한 비판적인 목소리가 예술원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와 같은 사정은 자유예술처럼 이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잡지를 발굴하고 대조해보지 않는 이상 알기 어렵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자료들, 흔히 인용되는 원전들은 대개가 문학사를 회고하고 기술(記述)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었던 존재들에 의해 생산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더 많은 자료들이 소개되어야 하고, 자명해 보이는 기존의 텍스트들의 기술과 재현을 의심하고 뜯어보아야 할 것이다.(해제: 나보령 _ 서울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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