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기는 근대 대중문화의 핵심적인 매체로, 1897년 대한제국 시절에 처음 소개된 이래로 우리나라의 음악은 물론 문화 전반에 걸쳐 큰 영향과 변화를 초래했다. 유성기음반을 빼놓고서 근대 공연예술이나 대중문화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유성기음반이 바로 근대 대중문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한국 유성기음반은 1906년에는 미국 콜럼비아와 빅터 레코드에 의해 처음 제작되었고, 일제강점기 이후 1911년부터는 일본축음기상회에서 조선반을 발매하기 시작했다. 그 뒤 1925년까지 일축의 독점체제가 유지되었으나 1925년 일동축음기가 조선반을 내기 시작하면서 양대 회사의 경쟁체제로 접어들었다. 1920년대 일본의 음반회사는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축음기상회와 오사카를 기반으로 하는 일동축음기가 양대 축을 이루었고, 그 경쟁체제는 조선 시장에까지 확대되었다.
일축(日蓄)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음반회사로 1907년에 도쿄에서 설립되었으며, 1911년 9월부터 조선반을 내기 시작했다. 일축은 처음에는 독수리[鷲印] 그림을 회사의 로고로 삼았고 1920년대에는 남대문과 태극 문양을 사용했다. 일축은 1928년 이후 전기녹음 기술을 도입하면서 미국 콜럼비아와 합작해 일본 콜럼비아로 개칭되었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 발매한 일동축음기
일동(日東) 축음기 주식회사 또는 닛토(NITTO) 레코드는 1920년 오사카에서 창립되었는데, 외국과 합작선이 없는 일본 국내 자본이었다. 일동은 1925년 9월부터 조선반을 발매하였고, 제비[ツバメ]를 상표로 사용했기 때문에 보통은 제비표 조선레코드라고 한다. 1928년부터 콜럼비아(일축)와 빅타 레코드에서 전기녹음 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하자 일동은 구식 나팔로 취입된 조선반 생산을 중단했으며, 1935년 태평레코드와 합병해 대일본축음기 주식회사가 되었다.
일동에서 한국음반을 발매한 기간은 약 3년 정도에 불과하고, 모두 나팔녹음 음반이었다. 일동은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약 180매의 조선반을 발매했고, 내용상으로도 일축을 능가할 만큼 수준 높은 레퍼토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발매기간이 짧은 탓으로 잔존량이 매우 적어서 발견된 실물이 3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지금은 희귀 음반이 되었다. 우리에게는 윤심덕의 ‘사의 찬미’를 발매한 회사로 기억되고 있다.
『일동타임쓰』는 일동축음기 주식회사에서 발행한 유성기음반 대중잡지로 1926년 1월에 창간되었다. 일동레코드가 조선에 진출하던 무렵 조선의 음반시장은 이미 일축의 독점 체제가 형성되어 있었다. 조선의 음반시장은 규모가 크지 않았고, 조선 거주 일본인들이 주된 고객층이었다. 레퍼토리 역시 일본음보나 서양음보 위주로 공급되었으며, 실제 조선음보는 전체 시장의 20퍼센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판매기반이 취약한 군소 음반회사에서 조선시장에 진출해도 수익을 내기 어려운 구조였다. 더구나 일본 음반회사는 조선인의 음악이나 취향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 뿐 아니라, 출장 취입에 따른 제작 원가가 높아서 조선음반 제작은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축과 경쟁관계에 있던 일동의 진출은 조선 음반시장에 새로운 활력과 변화를 가져왔다.
일동은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오사카 지역에 기반을 둔 회사였다. 일동이 처음 조선에 진출할 때는 따로 지점을 설치하지 않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규슈(九州)영업소에서 조선시장을 총괄했다.
일동이 조선에 진출하자 치열한 판매경쟁이 펼쳐졌다. 1925년 2월 일동은 조선음악을 녹음하면서 우수한 음질을 담보하기 위해 오사카 본사로 명창들을 초청해 취입했다. 일축도 곧바로 3월부터 조선에 간이취입소를 설치하면서 연주자와 레퍼토리의 다변화를 시도했다. 일축은 8월부터 새 음보를 발매하면서 취입 기생들을 내세우며 홍보전을 펼쳤고, 9월 13일에는 매월신보사의 내청각에서 음반 취입자를 총동원해서 무료로 음반과 육성을 비교해서 듣는 신보발표회를 열었다. 일동 역시 이틀 뒤인 15~16일 양일간 같은 장소에서 ‘레코드와 육성 비교 실연회’를 열었다.
음반 홍보지 『류셩긔』와 『일동타임쓰』 희귀해
판매경쟁이 치열해지자 일축은 1925년 11월부터 홍보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일축 제품의 안내서 잡지 『류셩긔』를 각지 악기점에서 무료 진정(進呈)하오니 엽서로 신청하시오”(『동아일보』 1925년 11월 8일)라는 광고를 보면 처음에는 일축 제품 카탈로그에 약간의 음반 관련 기사를 싣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동은 3개월 뒤인 1926년 2월 유성기음반 잡지 『일동타임쓰』를 창간해 이에 맞서기에 이르렀다.
유성기 잡지는 상품 카탈로그 성격의 얇은 책자인데다 음반 수요 자체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잡지 또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지금은 일축이나 일동 잡지 모두 희귀본에 속해서 이 분야 연구자들도 실물을 접해본 적이 없고 일반인들은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 현재 실물이 확인된 것은 일축의 『류셩긔』 2책(아단문고 1책, 이보형 소장 1책)과 그와는 별도의 카탈로그(배연형 소장) 1책이 있고, 일동의 『일동타임쓰』는 아단문고 소장 3책과 고서경매에서 거래된 적이 있는 창간호 1책(소장자 미상)이 전부이다.
일축의 『류셩긔』는 창간 당시 무가지로 배포되었다가 나중에 10전짜리 유가지로 전환하면서 내용이 확대된 것 같다. 『일동타임쓰』는 15전짜리 유가지로 발행되었으며, 나중에는 무료로 배포했던 것 같다. 『류셩긔』는 월간으로 표기되어 있고 발행기간도 길지만 실물이 적어서 실제 매월 발행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일동타임쓰』는 월간 발행을 계획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보가 발매된 때에 맞추어 부정기적으로 발행되었다. 『일동타임쓰』는 통권 제5호까지 발행한 것은 확인되었다. 1927년 광고에는 “일동타임쓰 청구하시는 대로 무료 송정(送呈)하겠습니다”(『매일신보』 1927년 11월 6일)라는 문구가 등장하므로 만약 제6호가 발행되었다면 카탈로그 형태의 무가지일 가능성이 있고, 이것이 종간호일 것이다.
음반과 잡지의 기획․편집자는 이기세와 이서구
『일동타임쓰』는 가로 19㎝ × 세로 26㎝이고, 본문 13쪽의 소책자인데, 본문과는 별도로 표지와 화보 그리고 매호 뒤쪽에 ‘제비표 일동레코드 총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화보와 총목록은 별면으로 처리해 쪽수가 인쇄되어 있지 않다. 제3호(1926년 6월)는 총22쪽이며, 제4호(1926년 10월)와 제5호(1927년 6월)는 화보와 음반 발매량이 증가해 총 28쪽으로 늘어났다. 목차는 1쪽 하단에, 판권지는 본문 끝인 13쪽 하단에 실려 있다.
일동축음기는 처음 조선지점을 두지 않고 후쿠오카(福岡)에 있던 규슈영업소에서 관장했고 그 주임은 나이토 다케오(內藤武夫)가 겸직했다. 독자적인 판매망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기존의 유성기 판매점을 통해 유통할 수밖에 없었다. 『일동타임쓰』 제3호에 찍혀 있는 구기모토(釘本) 악기점 고무스탬프는 그런 사정을 보여준다. 구기모토는 일축의 대리점 역할을 하던 곳이다. 처음 『일동타임쓰』의 발행 주소지는 경성부 체부동 118번지이고, 제4호 이후에는 종로 탑동공원 정문 앞에 있는 일동의 조선총대리점인 조선축음기상회 내로 옮겼다.
일동레코드는 조선음반의 생산과 판매를 할 수는 있었지만, 선곡이나 연주자 섭외․홍보와 같은 일은 조선인에게 위임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일동 음반의 조선인 기획자는 이기세(李基世, 1888~1945)와 이서구(李瑞求, 1899~1981)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기세는 1926년 7월에 신설된 일동축음기 조선총대리점인 조선축음기상회의 대표에 취임했고(『조선일보』 1926년 7월 21일), 일동에서 다량의 음반을 취입한 박월정 명창이 그의 부인이었던 점을 보면 이기세가 기획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기세의 영향력 없이 박월정이 그렇게 많은 음반을 내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기세는 1923~1928년에 『매일신보』 사회부장과 편집인․발행인을 역임했다. 이서구 역시 같은 신문사의 기자로 1925년 9월 15일에 개최된 ‘레코드와 육성 비교 실연회’에 사회를 맡았으며(『매일신보』 1925년 9월 18일), 1926년 1월에 창간된 『일동타임쓰』의 편집인으로서 활동했다. 이기세는 일동 음반의 기획을, 이서구는 『일동타임쓰』의 편집을 맡아서 홍보를 책임진 것으로 짐작된다. 두 베테랑의 활약으로 일동은 단기간에 당대 명창의 음반을 체계적으로 제작할 수 있었다. 1928년 이후 일동이 조선반 생산을 포기하자 이기세는 빅타에서, 이서구는 시에론에서 각각 문예부장을 지내면서 조선음반 제작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일동타임쓰』는 이 두 언론․편집인의 역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판 『일동타임쓰』는 일본어판의 자매지로 편집 체제도 유사하고 ‘낙화집(落花集)’, ‘청음기신문(聽音記新聞)’란 등은 일본판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창간호의 표지는 일본판 디자인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용은 조선판 독자적인 것이다. 일본어판에서 조선판 발행을 알리는 단신을 싣기도 했다.
“본지는 일동축음기회사가 지난 번 조선음곡 취입 레코드를 제작 발매했던 것을 계기로 삼아 현지 레코드 팬에게 축음기 지식을 보급할 요량으로 본지와 한 몸인 조선어 타임즈 발행을 기획했다. 그것을 편집, 인쇄 중이었는데, 이제 드디어 제1호를 발행하게 되어, 이미 조선 각지에 배포를 마쳤다.”(『일동타임쓰』 1926년 5월, 일본어판)
음반 목록은 연구 가치 높아
『일동타임쓰』는 기본적으로 유성기와 음반 판매를 신장시키기 위해 음반회사에서 발행한 잡지이다. 여기에는 회사의 발매 음반 전목록과 함께 취입, 제작, 홍보, 대중들의 관심이나 반응, 명창들의 활동과 대담, 화제성 기사, 유성기음반에 대한 상식 등을 폭넓게 담고 있다. 음반에 대한 관심과 구매욕을 자극해 소비를 촉진하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당대의 기록으로는 가장 풍부하고 신뢰성이 높은 정보란 점에서 유성기음반 연구에는 최고급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유성기 잡지가 발굴된다면 당대의 실상을 매우 정확하게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회사의 홍보성 잡지이므로 연주자나 자사의 음반에 대한 평가가 객관적으로 기술되지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일동타임쓰』에 수록된 내용 중 정보적 가치가 가장 높은 것은 음반 목록이다. 유성기음반 발매를 파악할 수 있는 정보로는 음반 실물과 노랫말을 적은 가사지가 있다. 그러나 이런 자료를 전부 수집하가란 불가능하다. 광고 또한 매우 중요한 정보지만 모든 음반을 신문광고에 내지는 않는다. 광고는 주로 곡목이나 연주자를 표기하며, 음반번호를 적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에 반해 유성기 잡지에는 그달의 신보는 물론 기발매된 음반의 전목록을 부록으로 싣고 있어서 회사의 전목록과 음반번호까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동안 일동 음반은 제5회까지 발매된 110매의 음반번호 파악에 어려움을 겪었고, 신문광고에 나타나지 않는 제3회 음반 15매는 곡목조차 확인할 수 없었으나, 『일동타임쓰』가 공개됨으로써 목록이 완전하게 밝혀졌다. 이는 일동음반 연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더욱이 『일동타임쓰』 목록에도 나타나지 않는 음반(B19, B26, B95) 3종은 처음 계획과는 달리 녹음 실수나 원반 사고 등으로 인해 발매 자체가 취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확한 음반 목록은 음반 연구자에게 가장 중요한 기본 정보라고 할 수 있다.
대중 잡지로서 『일동타임쓰』의 특징은 제4호(1926년 10월)에서 잘 드러난다. 이 호는 거의 모든 기사가 윤심덕의 삶과 예술, 음반 취입, 연극 활동, 노랫말 등으로 채워져 있고, 표지 그림도 윤심덕의 얼굴을 연상케 한다. 그 중 이서구와 김을한이 필자로 확인된다. 윤심덕의 죽음에 대한 사회적 충격과 대중의 관심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음반의 홍보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보다는 분량이 적지만 제5호(1927년 6월)에는 월남 이상재의 서거와 함께 그가 취입한 연설 음반을 소개하는 기사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장례식장에서 이갑성의 소개로 월남의 유음 음반을 틀어서 청중을 숙연케 했다는 기사도 실려 있다. 이 두 사례는 『일동타임쓰』의 대중잡지적 성격을 보여준다.
『일동타임쓰』는 음악과 음반에 대한 계몽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제3호(1926년 6월)에 수록된 전통음악에 대한 명완벽(1842~1929, 이왕직아악부 악사장)의 글, 이덕창의 명창론, 제5호의 송만갑 명창 인터뷰 등은 전통음악에 대한 새로운 정보와 이론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판소리 추임새를 ‘야비한 야지(やじ, 놀림)’로 본다든지, 민족적 울분을 앞세우며 조선음악을 옹호하는 등 논리적인 미숙성과 허술한 해석도 보이지만, 판소리의 ‘바탈(바탕)’을 중고조(中古調)와 신조(新調)로 나누고, 박기홍을 조선소리의 끝을 막은 중고조의 대가로 서술하고 있는 것은 판소리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기술이다. 판소리 유파 개념을 언급한 최초의 문헌이기 때문이다. 판소리에 대한 이론이 없던 1920년대에 이만큼 체계적으로 판소리 예술론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도 놀라울 뿐만 아니라 『일동타임쓰』의 문헌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또한 송만갑 명창의 출생과 학습내력, 활동 상황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고, 운현궁에서 흥선 대원군의 연회와 순종의 마마 완쾌를 축하하는 잔치에서 고종황제 앞에서 강소춘과 함께 소리를 하던 상황까지 구체적으로 진술되어 있다. 그동안 막연하게 전하던 ‘어전광대’의 활동 상황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평생 명창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재산을 모았느냐는 질문에 “큰 재산을 모았지요. 좀 보시렵니까?” 하고 꺼내든 것이 ‘송만갑’이라고 쓰인 명함 한 장이라는 기록은 감동적이기도 하다.
매호에 실린 ‘낙화집’은 독자의 엽서 문의에 답하는 형식인데, 당시 음반 고객층의 관심과 가수들의 활동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무성영화 변사의 ‘애국의 나팔’ 대본, 유성기와 윤심덕의 제비표 음반을 소재로 하는 코미디 ‘노래와 사랑’ 등 대중문학 작품도 수록했다. 음반 제작에 따른 기술적인 문제를 소개(제5호)하는 글은 당시 유성기에 대한 일반인들의 교양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또한 ‘대머리생’이란 필명으로 기생과 오입장이의 관점에서 기생사회를 비판하는 글은 당시 연예활동의 중심에 있던 권번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에디슨 유성기로 목소리 상소문 올린 이하영
특기할 것으로는 『일동타임쓰』 제4호에서 조선에서 처음으로 유성기에 취입한 사람이 이하영(李夏榮, 1858~1929)이란 사실을 밝힌 점이다. 그는 1887년 대한제국의 전권대신 박정양의 서기관으로 미국에 파견되었는데, 박정양이 귀국한 뒤에는 그를 대신해 전권대사서리가 되었다. 그는 당시 고종황제에게 올리는 상주문(上奏文)을 기발하게도 유성기에 취입해 선교사 편으로 본국에 보냈다고 한다. 고종은 문무백관을 모아놓고 레코드를 들었는데, “하영의 소리는 들리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실용성을 지닌 에디슨의 완성형 유성기(Perfected Phonograph)가 발표된 것이 1888년 6월이고, 이하영이 귀국한 것은 1889년이었다. 그는 브라운왁스로 직접 녹음이 가능한 에디슨 유성기가 발표되자마자 곧바로 그것을 이용해서 조정에 보고서를 올린 셈이다. 에디슨이 고종에게 보낸 유성기 판매 기록이 남아 있으므로 면밀하게 고증이 된다면 우리나라에 유성기 도입 시기는 10년을 더 앞당기게 된다. 이하영은 철도모형을 가지고 귀국해서 우리나라 철도건설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하나 나중에는 매국노의 길을 걸었고, 손자들과 함께 일동레코드를 들으면서 말년을 즐겼다고 한다.
『일동타임쓰』는 매호 권두에 화보를 싣고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진은 윤심덕과 이상재의 음반 취입 광경이다. 그동안 이 사진은 개별적으로 소개되기도 했으나 『일동타임쓰』가 원본의 출처임이 밝혀졌다. 조선축음기상회의 전정(全景) 사진도 1920년대 유성기 판매상점을 촬영한 희귀한 자료이다. 그밖에도 여러 명창과 가수의 사진이 있는데, 이미 신문을 통해서 알려진 것도 모두 『일동타임쓰』가 원본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화질도 빼어나서 활용 가치가 높다.(해제: 배연형 _ 한국음반아카이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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