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시론』은 1920년 1월에 창간되어 같은 해 3월에 2호, 4월에 3호, 6월에 4호, 11월에 5호를 발간하고 이듬해인 1921년 4월에 6호를 발간하였다가 4월 23일자로 발매반포 금지 처분을 받아 통권6호로 종간된 순국문체 여성지다. 현재 창간호(1920.1.24)와 3호(1920.4.28)가 확인된다. 3호는 여기에 수록된 판본이 유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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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시론』은 1920년 1월에 창간되어 같은 해 3월에 2호, 4월에 3호, 6월에 4호, 11월에 5호를 발간하고 이듬해인 1921년 4월에 6호를 발간하였다가 4월 23일자로 발매반포 금지 처분을 받아 통권6호로 종간된 순국문체 여성지다. 현재 창간호(1920.1.24)와 3호(1920.4.28)가 확인된다. 3호는 여기에 수록된 판본이 유일본이다.
창간호와 3호 모두 편집겸발행인은 이양전(李良傳), 주간은 창간호의 경우 이종숙(李鍾肅), 3호의 경우 김미리사(金美理士=차미리사)이다. 1920년 2월 20일에 창립된 조선여자교육협회의 회장인 차미리사는 동년 3월에 월간지 『여자시론』을 인수하여 2호부터 조선여자교육협회의 기관지로 삼았다.
이 잡지의 특이한 점은 국내가 아닌 일본에서 발행되었다는 사실이다. 편집겸발행인인 이양전과 발행소인 여자시론사가 일본에 있었고, 인쇄인은 오리사카 도모유키(折坂友之), 인쇄소는 요코하마(橫濱)의 복음인쇄합자회사였다. 다른 여성지들에 비해 조금 비싼 편으로 정가 35전이고 국내 판매 총대리부는 광익서관이 맡았다.
창간호의 「선언합니다」와 「여언」을 보면, 신구여성을 포괄하는 여자계 전체를 대상으로 여성해방, 특히 가정개조의 혁명에 주력하고자 이 잡지가 발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잡지명을 ‘시론’으로 한 이유에 대해 편집진은 “문예보다 언론을 주안으로 한 터”라고 했는데, 실제로 이 잡지에 실린 글들은 ‘언론’에 해당하는 ‘논설’류가 압도적으로 많다. 창간호의 경우, 「여자교육에 대한 의견」(P생), 「가혹한 예절을 타파하라」(탄파생), 「여자해방문제」(방순경), 「결혼의 목적은 무엇이냐」(C생), 「유학생의 견지로부터 보는 조선가정」(상아탑), 「조선여자의 처지」(송경선), 「머리의 개조와 생활의 개조」(염상섭) 등이 있고 제3호의 경우, 「양성문제」(C生), 「현금 조선부인의 책임」(허정자), 「사랑」(홍백후), 「지식은 우리의 생명」(박숙원), 「이상적 결혼」(최영택), 「우리가 급히 고칠 것은 무엇이냐?」(조숙경), 「여자의 세 가지 크게 요긴한 의무」(관해생), 「잘 때냐? 깰 때냐?」(김연숙), 「어머니의 힘」(춘성) 등이 실려 있다. 이러한 논설들은 남녀평등과 여성해방 및 가정개조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해제: 신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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