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러질 듯한 옛 신문더미에서 식민지의 표정을 읽다
─ 매일신보 한글판 발굴
1910년 8월 28일 대한매일신보 한글판과 국한문판의 3면 ‘잡보’란에는 「시국 문제」라는 기사가 실렸다. “모처에서 온 확실한 소식”을 들으니 지난 8월 22일 한일합병 조약이 “정식으로 조인”되었고 “한일합병의 선언서와 조약과 각 관제와 여러 법규는 명일[29일]에 발표하기로 결정했다더라”는 것이다. 자기 나라가 망했다는 비보를 이처럼 무미건조하게 전하는 글이 또 어디 있을까? 이날 신문에는 「시일야방성대곡」 같은 비분강개한 논설도, 누군가 목숨을 끊어 저항했다는 소문도 없다. 그 잡보만 빼면 무사태평한 하루 같다.
통감부에 매수된 민족주의 정론지
8월 29일은 신문 휴간일이고 그 다음날인 8월 30일에 호외 아닌 호외가 발행되었다. 8월 29일자로 작성된 천황의 조칙 ․ 칙유 ․ 조서와 8월 22일자의 조약 등이 1면에 실렸다. 2면의 「동화(同化)의 주의(主意)」라는 논설에서는 “이제 두 나라 군주의 성의를 몸 받아서 감히 어길 바 없고 일본의 문명한 정치 아래에서 함께 화하는 지경에 나아가서 극동의 평화주의를 영구히 떨어지지 않게 할지어다”(매일신보 한글판 1910년 8월 30일, 정진석, 언론 조선총독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65면에서 인용. 현대어 표기로 바꿈. 이하 같음)라고 강조했다.
이날 신문의 4면 잡보란에는 「보사 명호 개정(報社名號改正)」이 실려 있다. “대한의 국호를 조선이라 개칭한 후에는 대한으로 그제 두는 것이 사세에 그렇지 아니하므로 본보 명호 중 대한 이 자를 제하여 없애노라”(정진석, 위와 같음)고 했다. 이제 나라 이름이 대한제국에서 조선으로 달라졌으므로 ‘대한매일신보’라는 신문의 이름에서 ‘대한’ 두 글자를 떼어 버리고 ‘매일신보’로 바꾼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해서 대한매일신보는 매일신보로 탈바꿈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배설(裵說, Bethell)이 창간한 일간지다.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 6면이었는데 두 면은 한글판, 네 면은 영문판이었다. 이듬해인 1905년 8월 11일부터는 국한문판과 영문판으로 바뀐 대신 한글판이 없어졌다. 영문판 제호는 The Korea Daily News이며 한글판은 1907년 5월 23일에 따로 창간되었다.
한국통감부는 민족주의 진영의 최대 정론지였던 대한매일신보를 집요하게 공격하고 발행인을 탄압했다. 배설은 1908년 5월 27일 발행인 명의를 영국인 만함(萬咸, Marnham)에게 넘기고 이듬해 1909년 5월 1일 사망했다. 한국통감부는 대한매일신보를 매수하기 위해 만함을 회유했다. 결국 만함은 1910년 6월 9일을 끝으로 신문사를 이장훈에게 팔고 영국으로 떠났다. 이때부터 대한매일신보사는 한국통감부의 손에 장악되었다. 한일합병을 알리는 8월 28일자 기사가 그렇게 평온할 수 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인용문과 사진으로만 알려진 한글판
한일합병 이후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8월 30일부터 매일신보로 제호를 바꾸고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변신했다. 신문사 경영을 감독했던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峯)가 1910년 10월 어느 날 전 직원에게 “매일신보가 신문지로서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천황 폐하의 인애(仁愛)하심과 일본인 일시동인(一視同仁)하심을 받들어 한국에 선전함에 있”다고 훈시한 데에서 매일신보의 정체성이 잘 드러난다.
경영 주체와 편집 방침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매일신보는 전과 마찬가지로 국한문판과 한글판을 동시에 발행했다. 신문의 지령도 그대로 이어받아 국한문판은 제1,462호, 한글판은 제939호가 되었다. 국한문판 매일신보 1910년 9월 21일자 1면에 실린 「국문의 필요」에는 “본사에서 국문으로 동포의 지식을 발전하는 데 필요로 인(認)하는 자는 한문을 해득하는 인(人)은 소(少)하고 국문을 해득하는 인은 초다(稍多)하므로 국문 신보(申報)를 간행한 지가 958호에 지(至)하였도다”라 했으니 매일신보가 한일합병 이후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국한문판과 한글판을 함께 발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글판은 그리 오래 발행되지 못했다. 1년 6개월 뒤인 1912년 3월 1일부터 한글판을 폐간하고 국한문판만 발행했다. 이날 2면과 3면에 실린 사고 「언문 신문의 합병」에 따르면 당일부터 지면을 대확장하고 “순 언문 신문을 폐지하고 3면, 4면에는 순 언문 기사를 게재”했으며, 특별 주문한 “언문 5호 활자”로 전 지면을 개량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정치 ․ 경제면인 1면과 2면은 국한문으로, 사회 ․ 문화면인 3면과 4면은 한글로 제작되었다. 활자 크기가 작아짐에 따라 지면은 7단 조판에서 8단 조판으로 더 조밀해졌다.
매일신보 한글판은 1910년 8월 30일부터 1912년 2월 29일까지 발행되었다. 위의 사고에서 밝힌 것처럼 언문 신문을 ‘폐지’한다고 했으니 그전까지는 한글판이 계속 나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매일신보 한글판은 단편적인 글과 사진으로밖에 알려지지 않았다. 앞에서 본 것처럼 언론학자 정진석이 1910년 8월 30일자 한글판 사설과 사고를 인용한 것, 한국 신문 백년─사료집(한국신문연구소, 1975, 95면)과 한국 신문 백년지(한국신문연구원, 1983, 391면)에 수록된 1910년 10월 5일자(969호) 한글판 1면 사진이 현재까지 매일신보 한글판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자료였다. 지금까지 매일신보 연구는 영인본으로 간행된 국한문판만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한글판 44개 호 첫 공개
이번에 아단문고는 매일신보 한글판을 찾아내 처음으로 공개한다. 현재 아단문고에 소장된 한글판은 1910년 8월 31일(940호)부터 1910년 12월 21일(1,032호)까지 총 44개 호수다. 1910년 12월 22일부터 1912년 2월 29일까지 발행된 신문이 모두 빠져 있어 아쉽지만, 초창기 매일신보의 지면 구성과 체재, 국한문판과 다른 점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원본의 보존 상태는 양호하지만 백년이 넘는 시간을 버틴 것이 버거운지 지면을 넘기면 금세라도 바스러질 것 같다. 접힌 부분 가운데 찢어진 것은 다른 신문 쪼가리로 붙여 놓아서 감춰진 글자를 확인하기 어렵다. 다음은 1910년도 매일신보 한글판의 소장 목록이다.
번호
발행일자
지령
비고
번호
발행일자
지령
비고
1
8월 31일
940호
발행 겸 편집인
리쟝훈
3면 소설
속 옥랑전
23
10월 21일
982호
2
9월 1일
941호
24
10월 22일
983호
발행겸 편집인 변일
인쇄인 리챵
3
9월 2일
942호
25
10월 23일
984호
4
9월 3일
943호
26
10월 25일
985호
5
9월 4일
944호
27
10월 26일
986호
6
9월 6일
945호
28
10월 27일
987호
7
9월 7일
946호
29
10월 28일
988호
8
9월 8일
947호
30
10월 29일
989호
9
9월 9일
948호
31
10월 30일
990호
10
9월 10일
949호
32
11월 1일
991호
11
9월 11일
950호
33
11월 2일
992호
12
9월 27일
962호
1면 잡보
속 콜늬버젼
3면 소설
속 금자동
34
11월 3일
993호
천장절 특집
1면 절부전
3면 효자전
13
9월 28일
963호
35
12월 8일
1,021호
14
10월 4일
968호
1면 잡보
속 콜늬버젼 (완)
36
12월 9일
1,022호
15
10월 6일
970호
1면 잡보
속 박효자 (완)
37
12월 10일
1,023호
16
10월 8일
972호
1면 잡보
장성
38
12월 13일
1,025호
17
10월 9일
973호
39
12월 15일
1,027호
3면 리약이 모집하는 광고
18
10월 14일
977호
1면 신소설
화세계 (3)
40
12월 16일
1,028호
19
10월 15일
978호
41
12월 17일
1,029호
20
10월 16일
979호
42
12월 18일
1,030호
21
10월 19일
980호
43
12월 20일
1,031호
22
10월 20일
981호
44
12월 21일
1,032호
서사문학 자료 풍부하게 실려 있어
초창기 매일신보는 활자나 체재 면에서 대한매일신보와 거의 동일하다. 제호가 가로쓰기에서 세로쓰기로 바뀌었지만 논설, 잡보, 학계보 등의 지면 구성은 큰 차이가 없다. 한글판 대한매일신보 1910년 8월 29일자와 한글판 『매일신보』 8월 31일자를 비교해 보면, 1면의 「부지런치 아니하면 망함」, 3면의 소설 「옥랑전」은 서사가 서로 연결되고, 4면의 ‘매일신보 각처 지사 광고’는 두 호가 모두 동일하다.
매일신보는 대한매일신보와 마찬가지로 서사문학 자료가 풍부하게 실려 있다. 국문학자 김영민은 “근대 계몽기 한국 문학사에서 잡보 및 소설란을 통한 작품의 발표는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정착”(김영민, 문학제도 및 민족어의 형성과 한국 근대문학, 소명출판, 2012)되었다고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대한매일신보에는 약 120여 편의 서사문학 자료가 실려 있는데, 이 가운데 한글판에 실린 자료가 40여 편이고 국한문판에 실린 자료가 80여 편이다. 또한 1910년부터 1919년까지 국한문판 매일신보에는 약 150편 정도의 길고 짧은 창작 서사물이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매일신보 한글판을 보면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910년 8월 16일부터 대한매일신보 한글판 ‘소설’란에 연재되었던 「옥랑전」은 8월 28일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9월 12일과 9월 26일 사이의 어느 날에 완결되었다. 한글판 매일신보 9월 11일자의 「속 옥랑전」이 미완이고 9월 27일에 「속 금자동」이 3면 소설란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금자동」은 1910년 10월 11일쯤 끝난 것으로 보인다. 1911년 10월 12일부터 1면 ‘신소설’란에 이해조의 「화세계」가 연재되기 때문이다. 한글판 매일신보 1910년 10월 14일자 1면 ‘신소설’란에 「화세계」3회가 등장하는데, 이해조의 이 작품은 한글판과 국한문판 1면 소설란에 동시에 실리고, 그 뒤에도 두 지면에 동시에 연재된다.
한글판 매일신보에는 그 밖에도 단형 서사물로 보이는 작품이 여럿 등장한다. 「이괄의 사적」 「병자호란」 「박효자」 「장성」 「홍옥」 등의 역사물과 걸리버 여행기를 번역한 「콜늬버젼」도 연재된다. 이들 서사물은 앞으로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재미있고 우스운 이야기 모집도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한글판에 ‘이야기 모집 광고’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국한문판 12월 13일자에는 ‘신시(新詩) 현상 모집 광고’가 실리는데, 그해 12월 20일까지 ‘한강조설(寒江釣雪)’ ‘전화(電話)’를 주제로 절구(絶句)나 율시(律詩)를 보내 주면 갑은 50전, 을은 30전의 현상금을 주겠다는 내용이다. 이틀 뒤인 12월 15일자 한글판 3면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모집하는 광고’가 실린다.
“본사에서 재미있고 우스운 이야기를 모집하여 날마다 신문에 내어 신문 보시는 형제자매의 파적거리가 되게 할 뿐 아니라 유리한 이야기는 세상 사람을 경동하는 데 유익함이 적지 아니하오니 바라건대 형제자매는 듣고 보신 일 가운데 우습고 재미있는 것을 본사로 적어 보내시면 본사에서 그중에 좋은 것으로 택하여 신문에 올리고 ○를 따라 상급을 드리겠사압.
일등 20전
이등 15전
매일신보사 고백”
국한문판 매일신보는 1912년 2월 9일에 ‘응모단편소설’을 모집하면서 단편소설을 적극적으로 연재하는데, 실제로는 훨씬 전부터 독자들을 지면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가 ‘신시’보다 현상금이 절반 이하로 책정된 것도 재미있다.
천황 사진 수록한 별색 특별호
아단문고 소장 한글판 매일신보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지면은 1910년 11월 3일자다. ‘천장절’ 기념 특집호인 이날 신문은 1면과 4면은 붉은색, 2면과 3면은 파란색으로 인쇄되었다. 1면 한복판인 3단과 4단 가운데에 ‘천황폐하 어존영(御尊影)’이라고 해서 메이지 천황의 사진이 네모 칸 안에 실려 있다. 같은 날 국한문판 1면에도 ‘성수 만세(聖壽萬歲)’라는 글과 함께 메이지 천황의 사진이 실려 있는데, 사진은 원 안에 들어 있고 그 아래에는 아치 모양의 다리 사진이 있다. 같은 경축일의 지면을 왜 이렇게 달리 배치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번에 한글판 매일신보가 공개됨으로써 연구자들을 들뜨게 할 소재가 많을 것이다. 예컨대 4면에 실린 ‘각처 지사 광고’를 보면 특정 시점부터 지사 수가 줄어들고 특히 평안도의 낙폭이 큰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 밖에 여러 단형 서사물의 필자가 누구인지, 매일신보에 이해조의 신소설이 본격적으로 연재되기 전까지 등장하는 여러 서사문학의 성격 등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분석이 필요하다. 또한 한글판과 국한문판에 실린 광고 지면의 차이에 주목해보면, 당시 총독부의 정치적 지배전략과 독자층의 분포 등을 새로운 시선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해제: 박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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