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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잡지 > 유학생
제호(잡지명)
  • 한글대한흥학보 1호
  • 한문大韓興學報 1號
발행자
  • 발행인高元勳
  • 발행인 주소日本 東京市 麴町區 3番町 69番地
  • 편집인姜荃
  • 편집인 주소日本 東京市 麴町區中 6番町 49番地
  • 인쇄인金源極
  • 인쇄인 주소日本 東京市 麴町區中 6番町 49番地
출판사
大韓興學會事務所 대한흥학회사무소
발행지
日本 東京市 麴町區中 6番町 49番地
인쇄소
大韓興學會出版部 대한흥학회출판부
인쇄지
日本 東京市 麴町區中 6番町 49番地
창간일
1909년 2월 20일
간행일
1909년 2월 20일
인쇄일
1909년
통권
1호
간별
월간
형태
  • 면수93page
가격
  • 광고료半頁 3원, 1頁 5원원

목차

대한흥학회 취지서(大韓興學會 趣旨書)
보설(報說)
축사(祝辭) _ 유학생감독(留學生監督) 신해영(申海永) 류심근(柳芯根) 수당생(綏堂生) 권윤(權潤) 한광호(韓光鎬) 해견생(海見生) 강매(姜邁)
본회의 과거 급 장래(本會의 過去 及 將來) _ 고원훈(高元勳)
개인독립 사자로 대고아한동포(個人獨立 四字로 大告我韓同胞) _ 이승근(李承瑾)
청국의 각성과 한국(전 대한학회월보 속)(淸國의 覺醒과 韓國(前 大韓學會月報 續)) _ 채기두(蔡基斗)
적자생존(適者生存) _ 김영기(金永基)
아국의 연극장 소식(我國의 演劇場 消息) _ 김원극(金源極)
신한국인은 신한국열을 요진뎌(新韓國人은 新韓國熱을 要진뎌) _ 조용은(趙鏞殷)
단체의 대 이해관념(團體의 對 利害觀念) _ 윤태진(尹台鎭)
논 사회진화지원칙야 이위아지사동포(論 社會進化之原則야 以慰我志士同胞) _ 라홍석(羅弘錫)
일괴열혈(一塊熱血) _ 홍명희(洪命憙)
교육자의 주의(敎育者의 注意) _ 정경윤(鄭敬潤)
가정교육법(전 태극학보 제27호 속)(家庭敎育法(前 太極學報 第卄七號 續)) _ 김수철 역술(金壽哲 譯述)
가축개량의 급무(전 대한학보 제9호 속)(家畜改良의 急務(前 大韓學報 第九號 續)) _ 이혁(李赫)
한국 잠업에 대한 의견(韓國蠶業에 對한 意見) _ 노정학(盧庭鶴)
경찰 성질의 관념(警察性質의 觀念) _ 남기윤(南基允)
각룡(閣龍)
강지도완경기(江之島玩景記) _ 박윤철(朴允喆)
세모우감(歲暮偶感) _ 벽농생 윤병철(碧農生 尹炳喆)
생조유감 음 시월 이십구)(生朝有感 陰 十月 卄九) _ 송남생 김원극(松南生 金源極)
신년기회(新年羈懷) _ 미산조부 김영기(米山造父 金永基)
상원(上元) _ 박초양(朴楚陽)
계명가(鷄鳴歌) _ 변희준(邊熙駿)
농가필독(해충 구제제)(農家必讀(害蟲 駈除劑)) _ 한용(韓溶)
일본 문명관(전 대한학보 제9호 속)(日本文明觀(前 大韓學報 第九號 續)) _ 최석하(崔錫夏)
정치상으로 관 황백인종의 지위(전 대한학보 제9호 속)(政治上으로 觀 黃白人種의 地位(前 大韓學報 第九號 續)) _ 「라인시씨 약술」(「라인시氏 略述」) 한흥교 역(韓興敎 譯)
휘보(彙報)
회록(會錄)
제1회 임시평의회(第一回 臨時評議會)
제2회 임시평의회(第二回 臨時評議會)
제1회 정기평의회(第一回 定期評議會)
졸업 축하식(감독부 내 개최)(卒業 祝賀式(監督部 內 開催))
본회 총대 류태로씨 축사(本會 總代 劉泰魯氏祝辭)
졸업생 총대 남기윤씨 답사(卒業生 總代南其允氏 答辭)
제1회 회계부 광고(第一回 會計部 廣告)

해제

대한흥학회는 1909년 1월 일본에서 설립된 유학생 단체이다. 1905년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는 한국 유학생 수가 급증하면서 태극학회(太極學會), 공수학회(共修學會), 낙동친목회(洛東親睦會), 유학생구락부(留學生俱樂部), 호남학회(湖南學會), 광무학회(光武學會) 등 다수의 유학생 단체가 설립되었다. 이들 단체 중 일부가 통합하여 1908년에 대한학회(大韓學會), 다시 1909년 1월에 대한학회, 태극학회, 공수학회가 통합하여 설립된 단체이다.
대한흥학회는 ‘돈의연학(敦誼硏學)’과 ‘국민의 지덕계발(智德啓發)’을 설립 목적으로 내세우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유학생들 간의 애경사(哀慶事)를 함께 하여 우의를 돈독히 하며, 학업을 서로 권하여 유학생으로서 본래의 임무에 충실하도록 한다는 활동 지침을 규정했다. 또한, 일본에서 얻은 학술을 확장하며 고국 동포의 지덕을 계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대한흥학회의 조직은 회장 1인, 부회장 1인, 총무원 2인, 평의원 25인, 총회 서기원 2인, 평의회 서기원 1인, 집행임원회 서기원 1인, 간사원 5인, 회계부원 5인, 편찬부원 10인, 출판부원 5인, 교육부원 5인, 토론부원 4인 등으로 이루어졌다.
제1차 임원진으로는 회장에 채기두(蔡基斗), 부회장에 최린(崔麟), 총무원에 김홍량(金鴻亮), 최창조(崔昌朝) 등이 선출되었다. 단체 성립 초기 회원 수는 약 560명이었다. 대한흥학회는 기관지와 도서의 저작 출판, 토론 · 연설 및 체육 장려, 환난상구(患難相救) 및 경사축하(慶事祝賀) 등을 학회 활동 사항으로 제시했다.
학회 활동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기관지 발행이었다. 대한흥학회는 기관지인 『대한흥학보(大韓興學報)』를 1909년 3월 20일 창간하여 월간으로 발행했다. 『대한흥학보』는 일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판매되어 유학생들뿐 아니라 국내 국민들의 민지(民智) 계발과 지식 보급에도 기여했다. 1910년 5월 제13호까지 발행된 후 폐간되었다.
대한흥학회는 이러한 활동 외에도 재해 구휼(救恤), 강습회 개설 등의 활동도 펼쳤다. 또한, 1909년 12월 일진회(一進會)가 합방상주문(合邦上奏文), 청원서 및 성명서를 발표하자 총대의원를 본국에 파견하여 일진회의 행위를 성토하고 비판했다. 이후 일본 당국은 일본 유학생들과 대한흥학회를 감시하고 탄압하였고, 결국 1910년 8월 28일 해산되었다.(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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