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 구분
- 잡지 > 교육
- 제호(잡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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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교남교육회잡지 1권 5호
- 한문嶠南敎育會雜誌 1卷 5號
- 발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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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쇄인朴熙寬
- 편집 겸 발행인朴晶東
- 출판사
- 嶠南敎育會事務所 교남교육회사무소
- 발행지
- 皇城 中部 典洞
- 인쇄소
- 大同廣智社 대동광지사
- 인쇄지
- 中部 鍾路 鉢里洞 第9統 10戶
- 창간일
- 1909년 4월 25일
- 간행일
- 1909년 8월 25일
- 인쇄일
- 1909년
- 권호
- 1권 5호
- 통권
- 5호
- 간별
- 월간
-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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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수64page
- 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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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고료每行35字 20전, 半頁 1원, 1頁 1원 90전원
목차
경고(敬告) _ 회계원(會計員) 권중철(權重哲)
역법비고급통론(曆法備考及統論) _ 이근중(李根中)
물리학(物理學), 력론(力論) _ 박정동(朴晶東)
물권학(物權學)(속(續)) _ 김상교(金商敎)
지문학(地文學)(속(續)) _ 윤돈구(尹敦求)
제2상하급동서남북(第二上下及東西南北)
격화소양(隔靴搔癢) _ 권중훈(權重勳)
이국부민불여이민부국(以國富民不如以民富國) _ 이겸래(李謙來)
절위아교남신사부로(竊爲我嶠南紳士父老)하야 대성질호(大聲疾呼) _ 채장묵(蔡章黙)
일소교운지력의(一掃嶠雲之力疑) _ 김진호(金鎭浩)
4학설(四學說) _ 전욱(田郁)
종교원론(宗敎原論) _ 지비자(知非子)
인민(人民)의 교육(敎育) _ 백락거사(白洛居士)
오주강역기략(五洲疆域記略)(속(續)) _ 강하형(姜夏馨)
세계 각국(世界各國) 위호(位號) 어명(御名) 어년(御年) 급(及) 국(國)의 종류(種類) _ 창범(滄帆) 선(選)
추풍사(秋風辭) _ 채장묵(蔡章黙)
동서격언(東西格言) _ 북악산인(北岳山人)
문견록(聞見錄)(속(續)) _ 이석 이석병(彛石 李錫炳)
삼청동유기(三淸洞遊記) _ 이선호(李宣鎬)
삼청동탁족(三淸洞濯足) _ 추정 강하형(秋汀 姜夏馨)
교거유감(僑居有感) _ 우당 신철희(芋堂 申喆熙)
방우인(訪友人) _ 신철희(申喆熙)
우음(偶吟) _ 신철희(申喆熙)
화죽(畵竹) _ 소산 채장묵(笑山 蔡章黙)
성조공록(聖詔恭錄)
내지휘보(內地彙報)
관보적요(官報摘要), 농상공부소관농림학교규칙(農商工部所管農林學校規則)
학계휘보(學界彙報)
회록(會錄)
회원명부(會員名簿)(속(續))
제4호 회계보고(會計報告)
정오(正誤)
해제
교남교육회는 1908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애국계몽단체다. 경상남북도의 교육 진흥을 표방한 교육계몽운동단체로 교남교육회라고도 한다. 박정동(朴晶東)의 발기로 1908년 3월 15일 창립되었으며, 본부는 서울 전동(典洞)의 전 한어학교(漢語學校)에 두었다.
초대 임원은 회장에 이하영(李夏榮), 부회장에 상호(尙灝), 총무에 손지현(孫之鉉), 평의원에 박정동·이각종(李覺鍾), 간사원에 이원식(李元植)·이규한(李圭漢)·김병필(金秉泌), 서기원에 유시봉(柳時鳳)·이종연(李鍾淵), 재무부장에 장길상(張吉相), 회계원에 장택환(張宅煥)·권중훈(權重勳), 도서부장에 박정동, 교육부장에 안택중(安宅重) 등으로 구성되었다.
1908년 4월에 간행된 기관지 『교남교육회잡지』 창간호에 교남학회의 창립 취지가 실려 있다. 바로 전해인 1907년에 정미칠조약이 체결되고, 군대가 강제 해산되었다. 또 그 해 2월 말부터 전국적으로 확대되던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민족분열정책과 방해 공작으로 퇴조하고 있었다.
이러한 추세에 의해 1908년 1월에는 서우학회(西友學會)가 강제 해산당했다. 나아가 통감부 당국은 국권회복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해 온 애국계몽단체를 탄압, 통제하기 위해 ‘학회령(學會令)’을 선포해 모든 학회는 학부대신의 승인을 받도록 조처했다. 이 시기에 학회령에 의해 조직된 단체가 교남학회였던 것이다.
이 단체는 원래 교남 지방의 교육 진흥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먼저 서울에 사범학교를 설립하고 이어 경상도에 학교를 설립, 운영하기로 활동 방향을 정하고, 회보를 발간하여 민족교육열을 앙양하고자 했다.
그러나 학교 설립은 부진했고, 다만 기관지인 『교남교육회잡지』를 통권 12호까지 발행했을 뿐이다. 기관지는 1910년 5월 25일자로 12호까지 낸 뒤, 해산 결의도 없이 해산되었다. 당시 일제가 우리 민족의 집회·결사·출판의 자유를 봉쇄하기 위한 사전조처로서 각종 단체를 해산시켰기 때문이다.
애국계몽운동 퇴조기에 설립된 교남학회는 각박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민족교육의 주체성을 회복시키지는 못했으나, 지방 출신 인재의 교육 기회를 넓혀준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해제_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