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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잡지 > 교육
제호(잡지명)
  • 한글교남교육회잡지 1권 3호
  • 한문嶠南敎育會雜誌 1卷 3號
발행자
  • 인쇄인朴熙寬
  • 편집 겸 발행인朴晶東
출판사
嶠南敎育會事務所 교남교육회사무소
발행지
皇城 中部 典洞
인쇄소
大同廣智社 대동광지사
인쇄지
中部 鍾路 鉢里洞 第9統 10戶
창간일
1909년 4월 25일
간행일
1909년
인쇄일
1909년
권호
1권 3호
통권
3호
간별
월간
형태
  • 면수64page
가격
  • 광고료每行35字 20전, 半頁 1원, 1頁 1원 90전원

목차

지리학(地理學)의 원론(原論) _ 이연상(李然庠)
법인(法人)의 성질 급 종류(性質 及 種類) _ 김상교(金商敎)
신서산법(新書算法) _ 이근중(李根中)
교육회론(敎育會論) _ 한산 민종묵(翰山 閔種黙)
정교분문설(政敎分門說) _ 여영조(呂永祚)
불가유등급 불가무등급(不可有等級 不可無等級) _ 이겸래(李謙來)
교육(敎育)의 제도(制度) _ 권중훈(權重勳)
학회(學會)(속(續)) _ 임우탁(任宇鐸)
유불가폐(儒不可廢) _ 권중철(權重哲)
농공상학(農工商學)이 위금일(爲今日)의 급무(急務) _ 채장묵(蔡章黙)
수구개화론(守舊開化論) _ 윤돈구(尹敦求)
분저(糞苴) _ 장세창(張世昌) 선(選)
초목배양법(草木培養法) _ 장세창(張世昌)
내지휘보(內地彙報)
학계휘보(學界彙報)
송이석이군서유(送彛石李君西遊) _ 소송 이용은(小松 李容殷)
제본회관(題本會館) _ 이석 이석병(彛石 李錫炳)
송우지영양(送友之永陽) _ 이석병(李錫炳)
증손사군지현부진양(贈孫使君之鉉赴晋陽) _ 이석병(李錫炳)
송우인지남주(送友人之南州) _ 소산 채장묵(笑山 蔡章黙)
채련곡(採蓮曲) _ 소산 채장묵(笑山 蔡章黙)
술회(述懷) _ 우당 신철희(芋堂 申喆熙)
유거즉사(幽居卽事) _ 대암 권중훈(大庵 權重勳)
우제(偶題) _ 혜관 박정동(蕙觀 朴晶東)
탄사(嘆辭) _ 소천 박상호(小川 朴尙浩)
제가화(題假花) _ 대암 권중훈(大庵 權重勳)
지민(志憫) _ 창비 권상익(菖鼻 權相益)
보동원(步東園) _ 창비 권상익(菖鼻 權相益)
가옥세법시행세칙(家屋稅法施行細則)
주세법시행세칙(酒稅法施行細則)
연초세법시행세칙(煙草稅法施行細則)
기부금품모집취체규칙(寄附金品募集取締規則)
회록(會錄)
임원명부(任員名簿)(속(續))
제3호 회계보고(會計報告)
교남교육회규칙(嶠南敎育會規則)
통상회세칙(通常會細則)
교남교육회지회설립규정(嶠南敎育會支會設立規定)
경고(敬告)
정오(正誤)

해제

교남교육회는 1908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애국계몽단체다. 경상남북도의 교육 진흥을 표방한 교육계몽운동단체로 교남교육회라고도 한다. 박정동(朴晶東)의 발기로 1908년 3월 15일 창립되었으며, 본부는 서울 전동(典洞)의 전 한어학교(漢語學校)에 두었다.
초대 임원은 회장에 이하영(李夏榮), 부회장에 상호(尙灝), 총무에 손지현(孫之鉉), 평의원에 박정동·이각종(李覺鍾), 간사원에 이원식(李元植)·이규한(李圭漢)·김병필(金秉泌), 서기원에 유시봉(柳時鳳)·이종연(李鍾淵), 재무부장에 장길상(張吉相), 회계원에 장택환(張宅煥)·권중훈(權重勳), 도서부장에 박정동, 교육부장에 안택중(安宅重) 등으로 구성되었다.
1908년 4월에 간행된 기관지 『교남교육회잡지』 창간호에 교남학회의 창립 취지가 실려 있다. 바로 전해인 1907년에 정미칠조약이 체결되고, 군대가 강제 해산되었다. 또 그 해 2월 말부터 전국적으로 확대되던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민족분열정책과 방해 공작으로 퇴조하고 있었다.
이러한 추세에 의해 1908년 1월에는 서우학회(西友學會)가 강제 해산당했다. 나아가 통감부 당국은 국권회복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해 온 애국계몽단체를 탄압, 통제하기 위해 ‘학회령(學會令)’을 선포해 모든 학회는 학부대신의 승인을 받도록 조처했다. 이 시기에 학회령에 의해 조직된 단체가 교남학회였던 것이다.
이 단체는 원래 교남 지방의 교육 진흥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먼저 서울에 사범학교를 설립하고 이어 경상도에 학교를 설립, 운영하기로 활동 방향을 정하고, 회보를 발간하여 민족교육열을 앙양하고자 했다.
그러나 학교 설립은 부진했고, 다만 기관지인 『교남교육회잡지』를 통권 12호까지 발행했을 뿐이다. 기관지는 1910년 5월 25일자로 12호까지 낸 뒤, 해산 결의도 없이 해산되었다. 당시 일제가 우리 민족의 집회·결사·출판의 자유를 봉쇄하기 위한 사전조처로서 각종 단체를 해산시켰기 때문이다.
애국계몽운동 퇴조기에 설립된 교남학회는 각박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민족교육의 주체성을 회복시키지는 못했으나, 지방 출신 인재의 교육 기회를 넓혀준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해제_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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