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 구분
- 잡지 > 교육
- 제호(잡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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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교남교육회잡지 1권 2호
- 한문嶠南敎育會雜誌 1卷 2號
- 발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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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쇄인李基弘
- 편집 겸 발행인朴晶東
- 출판사
- 嶠南敎育會事務所 교남교육회사무소
- 발행지
- 皇城 中部 典洞
- 인쇄소
- 大同廣智社 대동광지사
- 인쇄지
- 中部 鍾路 鉢里洞 第9統 10戶
- 창간일
- 1909년 4월 25일
- 간행일
- 1909년 5월 25일
- 인쇄일
- 1909년 5월 24일
- 권호
- 1권 2호
- 통권
- 2호
- 간별
- 월간
-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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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수59page
- 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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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고료每行35字 20전, 半頁 1원, 1頁 1원 90전원
목차
위학무요정일(爲學務要精一) _ 이겸래李謙來
덕유언인유용(德有言仁有勇) _ 김상교(金商敎)
안일학문상대방(安逸學文上大妨) _ 강하형(姜夏馨)
사립학교 급 학회 창시설(私立學校 及 學會創始設) _ 여영조(呂永祚)
지설(誌說) _ 채장묵(蔡章黙)
문명설(文明說) _ 윤충하(尹忠夏)
신가국설(身家國說) _ 여영조(呂永祚)
태극교립설(太極敎立說) _ 지비자(知非子)
교남학생친목회 취지(嶠南學生親睦會趣旨) _ 장지연(張志淵)
임토작공(任土作貢) _ 김상교(金商敎)
축사(祝辭) _ 원석 이철주(圓石 李喆柱)
본회 제1회 기념식 축사(本會 第一會 紀念式祝辭) _ 이석병(李錫炳)
교육정곡 알(敎育正鵠 揠) _ 윤돈구(尹敦求)
수구론(守舊論) _ 이면석(李冕錫)
학회(學會) _ 동천 임우탁(冬泉 任宇鐸)
축사(祝辭) _ 성낙현(成樂賢)
축사(祝辭) _ 이승로(李承老)
경타론(警惰論) _ 백락거사(白洛居士)
춘추몽(春秋夢) _ 북악산인(北岳山人)
농자책고(聾者責瞽) _ 서홍렬(徐鴻烈)
경고 교남인사(警告嶠南人士) _ 이중화(李重和)
금일교남(今日嶠南) _ 이선호(李宣鎬)
황조사(黃鳥詞) _ 권중훈(權重勳)
춘성청앵(春城聽鶯) _ 권상익(權相益)
영고목(咏古木) _ 권상익(權相益)
제조선도(題釣船圖) _ 권상익(權相益)
양화강(楊花江) _ 황산 이종린(凰山 李鍾麟)
어사(漁詞) _ 황산 이종린(凰山 李鍾麟)
영도사(永道寺) _ 황산 이종린(凰山 李鍾麟)
수(愁) _ 황산 이종린(凰山 李鍾麟)
고목(古木) _ 소산 채장묵(笑山 蔡章黙)
고목(古木) _ 만취 이승로(晩翠 李承老)
부매(賦梅) _ 창산 노초(昌山 老樵)
회록(會錄)
임원명부(任員名簿)(융희(隆熙) 3년 3월)
회원명부(會員名簿)
제2호 회계보고(會計報告)
해제
교남교육회는 1908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애국계몽단체다. 경상남북도의 교육 진흥을 표방한 교육계몽운동단체로 교남교육회라고도 한다. 박정동(朴晶東)의 발기로 1908년 3월 15일 창립되었으며, 본부는 서울 전동(典洞)의 전 한어학교(漢語學校)에 두었다.
초대 임원은 회장에 이하영(李夏榮), 부회장에 상호(尙灝), 총무에 손지현(孫之鉉), 평의원에 박정동·이각종(李覺鍾), 간사원에 이원식(李元植)·이규한(李圭漢)·김병필(金秉泌), 서기원에 유시봉(柳時鳳)·이종연(李鍾淵), 재무부장에 장길상(張吉相), 회계원에 장택환(張宅煥)·권중훈(權重勳), 도서부장에 박정동, 교육부장에 안택중(安宅重) 등으로 구성되었다.
1908년 4월에 간행된 기관지 『교남교육회잡지』 창간호에 교남학회의 창립 취지가 실려 있다. 바로 전해인 1907년에 정미칠조약이 체결되고, 군대가 강제 해산되었다. 또 그 해 2월 말부터 전국적으로 확대되던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민족분열정책과 방해 공작으로 퇴조하고 있었다.
이러한 추세에 의해 1908년 1월에는 서우학회(西友學會)가 강제 해산당했다. 나아가 통감부 당국은 국권회복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해 온 애국계몽단체를 탄압, 통제하기 위해 ‘학회령(學會令)’을 선포해 모든 학회는 학부대신의 승인을 받도록 조처했다. 이 시기에 학회령에 의해 조직된 단체가 교남학회였던 것이다.
이 단체는 원래 교남 지방의 교육 진흥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먼저 서울에 사범학교를 설립하고 이어 경상도에 학교를 설립, 운영하기로 활동 방향을 정하고, 회보를 발간하여 민족교육열을 앙양하고자 했다.
그러나 학교 설립은 부진했고, 다만 기관지인 『교남교육회잡지』를 통권 12호까지 발행했을 뿐이다. 기관지는 1910년 5월 25일자로 12호까지 낸 뒤, 해산 결의도 없이 해산되었다. 당시 일제가 우리 민족의 집회·결사·출판의 자유를 봉쇄하기 위한 사전조처로서 각종 단체를 해산시켰기 때문이다.
애국계몽운동 퇴조기에 설립된 교남학회는 각박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민족교육의 주체성을 회복시키지는 못했으나, 지방 출신 인재의 교육 기회를 넓혀준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해제_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