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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구분
잡지 > 종합지
제호(잡지명)
  • 한글개벽 73호
  • 한문開闢 73號
발행자
  • 인쇄인김동옥
  • 인쇄인 주소서울시 견지동 32번지
  • 편집 겸 발행인김기전
출판사
開闢社 개벽사
발행지
서울시 경운동 88번지
인쇄소
漢城圖書株式會社 한성도서주식회사
인쇄지
서울시 견지동 32번지
창간일
1920년 6월 25일
간행일
1946년 1월 1일
인쇄일
1945년 12월 20일
통권
73호
간별
월간
가격
  • 정가10원

표지화 (삽화,컷)

목차

(卷頭言)復刊辭
(卷頭言)新年의 感激
獨立達成에 對한 一國民의 建議 憂國 _ 樵夫
朝鮮完全獨立까지의 吾人의 期待와 準備 _ 李敦化
海外 革命志士 還國歡迎辭
己未 獨立運動의 歷史的 意義 _ 金秉濟
獨立宣言書
我黨의 主義政策 _ 韓民黨宣傳部長 咸尙勳
朝鮮人民黨의 性格 _ 人民黨宣傳部長 金午星
新民族主義와 新民主主義 _ 國民黨宣傳部長 嚴雨龍
韓國獨立黨의 黨策 _ 韓國獨立黨 趙白山
朝鮮産業勞動調査所의 使命 _ 姜文錫
解放된 朝鮮 産業資源 _ 金燦承
過渡期와 文學建設의 方向 _ 白鐵
當面한 經濟救急策 _ 李健赫
聯合軍 進駐와 朝鮮 解放 _ 尹圭涉
民主主義 解說 _ 白衣人
鐵鎖 끊어지다 _ 安懷南
歷史(創作) _ 朴魯甲
밤 _ 徐廷柱
開闢아, 옛 동무야 _ 金岸曙
盟誓 _ 林學洙
獄中吟(漢詩) _ 李克魯
獄中有感(漢詩) _ 李林洙
카이로 宣言
포츠담 宣言
<解放 第二年의 文化界 展望>展望이라기보다 主張(創作) _ 李泰俊
<解放 第二年의 文化界 展望>批評家의 任務(評論) _ 李源朝
<解放 第二年의 文化界 展望>新進作家를 待望(演劇) _ 金永壽
<解放 第二年의 文化界 展望>解放된 美術(繪畵) _ 安碩柱
<解放 第二年의 文化界 展望>放送 編成의 解放(放送) _ 金晋燮
日人 財産處理 問題(落穗帖)
綜合藝術로서의 映畵(映畵) _ 朴基釆
黑과 白(落穗帖)
原子彈에 對한 警告(落穗帖)
吊 生神의 死(落穗帖)
猶太人 殺害(落穗帖)
日本에 産兒制限論(落穗帖)
自主獨立 _ 孔濯
朝鮮여성에게 呼訴함 _ 李景仙
葬介石將軍과 宋美齡女人 _ 金源珠
廣西의 抗日運動과 婦女 遊擊隊 _ 劉□鄕
農民文學 當面進路 _ 洪曉民
開闢社 風霜記 _ 活山
開闢日誌
臨時政府當面政策 十四個條
獨立運動의 裏面秘史 _ 李炳淳
避難者의 手記 _ 金洪俊

해제

천도교단(天道敎團)에서 민족문화실현운동으로 세운 개벽사(開闢社)에서 1920년 6월 25일 창간호를 발간했다. 천도교는 항일운동과 신문화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중, 민족문학 수립과 민족전통 문화유산 확립을 기본으로 언론·학술·종교·문예를 게재하는 종합월간지를 발간하기로 하고, ‘후천개벽사상’에서 이름을 따 ‘개벽사’를 창업하고 『개벽』을 발간하게 된 것이다.
창간 당시 사장은 최종정(崔宗禎), 편집인은 이돈화(李敦化), 발행인은 이두성(李斗星), 인쇄인은 민영순(閔泳純) 등이었다. 창간 이유는 “세계사상을 소개함으로써 민족자결주의를 고취하며, 천도교사상과 민족사상의 앙양, 사회개조와 과학문명 소개와 함께 정신적·경제적 개벽을 꾀하고자 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전체 지면의 약 3분의 1을 문학과 예술면으로 할애하여 소설·시조·희곡·수필·소설이론·그림 등을 게재하였고, 문체는 국한문혼용체를 썼다.
그러나 창간호는 발간과 동시에 표지(호랑이 그림)와 「금쌀악」·「옥가루」 등 몇몇 기사가 문제가 되어 일제에게 전부 압수되고 말았다. 이에 문제가 된 기사를 삭제하고 호외(號外)를 냈으나 이것마저 압수되어 다시 임시호(臨時號)를 발행했다. 그 뒤에도 시련은 계속되었고, 결국 1926년 8월 1일 통권 제72호(8월호)를 끝으로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폐간되었다. 폐간될 때까지 발매금지(압수) 40회 이상, 정간 1회, 벌금 1회 등 많은 압력과 박해를 받았으며, 그로 인한 경영난도 심각했다.
1934년 11월 차상찬(車相讚)이 『개벽』을 속간하여 제1호부터 제4호까지 내었으나, 1935년 3월 1일 다시 폐간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전의 『개벽』과 성격을 같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광복 후 1946년 1월 김기전(金起田)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개벽』을 복간하여, 1926년에 폐간된 『개벽』의 홋수를 이어 제73호부터 시작하여 1949년 3월 25일(통권 제81호)까지 모두 9호를 발행하고 자진 휴간했다.
최근 일제에 의해 압수·삭제된 149개의 기사 중 기존 영인본에서 누락되었던 21개의 기사(작품) 원문이 한 연구서의 부록으로 간행되었다.
『개벽』의 기사 영역은 종교·사상·정치·경제·산업·역사·천문·지리·문학·미술·음악·제도·기술·풍속·풍물·인물·시사 등을 아우르고 있으며, 현란하고 화려한 광고들에서 보듯이 유통되는 상품 내지 근대문물 전체에 관심을 갖고 있을 정도로 종합지적인 개방성을 보였고, 이를 통해 성공적으로 대중에게 다가설 수 있었다. 특히 천도교 조직사업의 일환으로 발행했던 잡지인 『개벽』에 종교적인 글이 별반 실리지 않았던 반면, 다른 신문과 잡지에 비교해보더라도 문예에 대한 지면 할애가 두드러졌다는 점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개벽』은 1900년대 당시 계급주의적 경향문학을 지향하던 신경향파 초기의 작가들을 많이 배출하여, 지면의 3분의 1에 달하는 문예면에 그들의 작품을 게재했다. 김기진(金基鎭)·박영희(朴英熙) 등의 평론가, 조포석(趙抱石)·현진건(玄鎭健)·김동인(金東仁)·이상화(李相和)·염상섭(廉想涉)·최서해(崔曙海)·박종화(朴鍾和)·주요섭(朱耀燮) 등의 문인들이 주로 『개벽』을 무대로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김유정(金裕貞)도 단편소설을 1편 발표했다.
그밖에 노수현(盧壽鉉)·김은호(金殷鎬)·이상범(李象範)·오일영(吳一英)·김응원(金應元)·고희동(高羲東) 등의 그림도 자주 소개하였고, 강암(剛菴)·운양(雲養)·성당(惺堂)·석정(石汀)·긍제(兢齊) 등의 서예도 소개했다.
민족항일기의 『개벽』은 일제의 정책에 항거하여 정간·발행금지·벌금, 그리고 발행정지 등의 가혹한 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민족의식 고취에 역점을 둔 대표적인 종합잡지이다. 뿐만 아니라, 문예잡지 못지않게 문학이론의 전개, 문학작품의 발표, 외국문학의 소개, 신인 발굴 등 다각적인 배려를 함으로써, 1920년대 문학창달에 기여한 바가 커서 이 시기 문학연구에 귀중한 문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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