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 구분
- 잡지 > 종합지
- 제호(잡지명)
-
- 한글개벽 신간 1권 2호
- 한문開闢 新刊 1卷 2號
- 발행자
-
- 인쇄인박인환
- 인쇄인 주소경성 공평동 55
- 편집 겸 발행인차상찬
- 편집 겸 발행인 주소경성 경운동 88
- 출판사
- 開闢社 개벽사
- 발행지
- 京城 경성 경운동 88
- 인쇄소
- 大東印刷所 대동인쇄소
- 인쇄지
- 경성 공평동 55
- 창간일
- 1920년 6월 25일
- 간행일
- 1934년 12월 1일
- 인쇄일
- 1934년 11월 30일
- 권호
- 1권 2호
- 간별
- 월간
- 가격
-
- 기타52전
목차
開闢社社友制大擴張
朝鮮文化의 再認識, (=氣分的 放棄에서 實際的 探索=) _ 朴英熙
世界의 危機와 歐洲政局 _ 辛日鎔
特別社告
非常時 現政局의 大觀, 非常時 岡田內閣의 治積, 三國誌같은 中國舞臺 現狀 _ 洪承耆
유國王의 暗殺과 國際政局 _ 高永煥
朝鮮米價의 展望 _ 申泰翊
中國政情과 蔣介石의 動向 _ 朴春光
朝鮮農地令의 檢討 _ 鄭寅寬
東拓移民事業의 今昔觀 _ 鄭秀日
開闢評壇
朝鮮率壻婚制考 _ 孫晋泰
朝鮮黨爭五百年史(其二) _ 洪木春
柳絮狂風에 춤추는 大洞江의 惡夢, - 三年前朝中人事變의 回顧 _ 琴童
新聞社長의 懺悔錄 _ 申錫雨
滿五十周年을 맞는 甲申改革亂의 回顧/-十二月四日=陰十月十七日- _ 車相瓚
八道江山遍踏記(其三)/泗泚古都覲禮 _ 朴魯哲
學窓漫話 _ 李東園
法窓閑話 _ 金正實
病院夜話 _ 劉相奎
黃公의 奇蹟(漫筆) _ 尹白南
國際外交秘話, 歐洲大戰前夜 _ 吳基永
次期大戰과 密偵群의 暗中飛躍 _ 朱世鎭
上海異域에 展開된 國際三角愛의 血祭 -李尙山孃의 悲戀의 眞相- _ 上海特派員 姜聖九
檀考 _ 湖山生
開闢色刷頁 YELLOW PAPER
百人百話
크리스마스 _ 李承萬
스파이 삽화
『싸벳트』文藝大會
文壇往來
歲暮街頭風景 _ 心田 盧壽鉉
統計室
보너스를 낙는 미끼 _ 金奎澤
우편물과 貨幣의 恐怖症 _ XYZ
上海시온會의 猶太人建國運動露滿國境地帶에서
財界短評 _ 汪村生
女俳優와 國民性
左側通行
貰집의 悲哀, 下宿生活의 悲哀 _ 李承萬
라디오
레코-드
新聞漫談
안악의 비밀(漫談) _ 李瑞求
第十三回協展評 _ 梁雨笛
作品에서 보는 『빨삭』藝術觀의 片鱗, 산 人間描寫問題에 關聯하-야 _ 朴英熙
尙虛의 作品과 그 藝術觀 _ 金煥泰
過鷺湖弔六臣墓 _ 月灘
흰모래 우를 것는 處女의 마음 _ 金海剛
『트리스탄』과 『이쏠데』 _ 李善熙
行路 _ 玄民
戱曲 찬우슴(全一幕) _ 金雲汀
憂鬱의 軌道 _ 嚴興燮
長篇 無絃琴(제2회) _ 廉尙燮
編輯餘墨
해제
천도교단(天道敎團)에서 민족문화실현운동으로 세운 개벽사(開闢社)에서 1920년 6월 25일 창간호를 발간했다. 천도교는 항일운동과 신문화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중, 민족문학 수립과 민족전통 문화유산 확립을 기본으로 언론·학술·종교·문예를 게재하는 종합월간지를 발간하기로 하고, ‘후천개벽사상’에서 이름을 따 ‘개벽사’를 창업하고 『개벽』을 발간하게 된 것이다.
창간 당시 사장은 최종정(崔宗禎), 편집인은 이돈화(李敦化), 발행인은 이두성(李斗星), 인쇄인은 민영순(閔泳純) 등이었다. 창간 이유는 “세계사상을 소개함으로써 민족자결주의를 고취하며, 천도교사상과 민족사상의 앙양, 사회개조와 과학문명 소개와 함께 정신적·경제적 개벽을 꾀하고자 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전체 지면의 약 3분의 1을 문학과 예술면으로 할애하여 소설·시조·희곡·수필·소설이론·그림 등을 게재하였고, 문체는 국한문혼용체를 썼다.
그러나 창간호는 발간과 동시에 표지(호랑이 그림)와 「금쌀악」·「옥가루」 등 몇몇 기사가 문제가 되어 일제에게 전부 압수되고 말았다. 이에 문제가 된 기사를 삭제하고 호외(號外)를 냈으나 이것마저 압수되어 다시 임시호(臨時號)를 발행했다. 그 뒤에도 시련은 계속되었고, 결국 1926년 8월 1일 통권 제72호(8월호)를 끝으로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폐간되었다. 폐간될 때까지 발매금지(압수) 40회 이상, 정간 1회, 벌금 1회 등 많은 압력과 박해를 받았으며, 그로 인한 경영난도 심각했다.
1934년 11월 차상찬(車相讚)이 『개벽』을 속간하여 제1호부터 제4호까지 내었으나, 1935년 3월 1일 다시 폐간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전의 『개벽』과 성격을 같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광복 후 1946년 1월 김기전(金起田)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개벽』을 복간하여, 1926년에 폐간된 『개벽』의 홋수를 이어 제73호부터 시작하여 1949년 3월 25일(통권 제81호)까지 모두 9호를 발행하고 자진 휴간했다.
최근 일제에 의해 압수·삭제된 149개의 기사 중 기존 영인본에서 누락되었던 21개의 기사(작품) 원문이 한 연구서의 부록으로 간행되었다.
『개벽』의 기사 영역은 종교·사상·정치·경제·산업·역사·천문·지리·문학·미술·음악·제도·기술·풍속·풍물·인물·시사 등을 아우르고 있으며, 현란하고 화려한 광고들에서 보듯이 유통되는 상품 내지 근대문물 전체에 관심을 갖고 있을 정도로 종합지적인 개방성을 보였고, 이를 통해 성공적으로 대중에게 다가설 수 있었다. 특히 천도교 조직사업의 일환으로 발행했던 잡지인 『개벽』에 종교적인 글이 별반 실리지 않았던 반면, 다른 신문과 잡지에 비교해보더라도 문예에 대한 지면 할애가 두드러졌다는 점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개벽』은 1900년대 당시 계급주의적 경향문학을 지향하던 신경향파 초기의 작가들을 많이 배출하여, 지면의 3분의 1에 달하는 문예면에 그들의 작품을 게재했다. 김기진(金基鎭)·박영희(朴英熙) 등의 평론가, 조포석(趙抱石)·현진건(玄鎭健)·김동인(金東仁)·이상화(李相和)·염상섭(廉想涉)·최서해(崔曙海)·박종화(朴鍾和)·주요섭(朱耀燮) 등의 문인들이 주로 『개벽』을 무대로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김유정(金裕貞)도 단편소설을 1편 발표했다.
그밖에 노수현(盧壽鉉)·김은호(金殷鎬)·이상범(李象範)·오일영(吳一英)·김응원(金應元)·고희동(高羲東) 등의 그림도 자주 소개하였고, 강암(剛菴)·운양(雲養)·성당(惺堂)·석정(石汀)·긍제(兢齊) 등의 서예도 소개했다.
민족항일기의 『개벽』은 일제의 정책에 항거하여 정간·발행금지·벌금, 그리고 발행정지 등의 가혹한 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민족의식 고취에 역점을 둔 대표적인 종합잡지이다. 뿐만 아니라, 문예잡지 못지않게 문학이론의 전개, 문학작품의 발표, 외국문학의 소개, 신인 발굴 등 다각적인 배려를 함으로써, 1920년대 문학창달에 기여한 바가 커서 이 시기 문학연구에 귀중한 문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