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 구분
- 잡지 > 종합지
- 제호(잡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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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개벽 41호
- 한문開闢 41號
- 발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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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행인이두성
- 발행인 주소경성부 익선동 61번지
- 편집인이돈화
- 편집인 주소경성부 삼청동 25번지
- 인쇄인민영순
- 인쇄인 주소경성부 청수정 8번지
- 출판사
- 開闢社 개벽사
- 발행지
- 京城 경성부 경운동 88번지
- 인쇄소
- 大東印刷株式會社 대동인쇄주식회사
- 인쇄지
- 경성부 공평동 55번지
- 창간일
- 1920년 6월 25일
- 간행일
- 1923년 11월 1일
- 인쇄일
- 1923년 10월 28일
- 통권
- 41호
- 간별
- 월간
- 가격
-
- 기타52전
목차
新朝鮮의 운명과 農民의 地位
돈아! 네 일홈이 돈이지!! _ P. S. L 生
現代經濟組織의 모순, -엇던 多少間 교양잇는 失業한 熟練職工과의 대화- _朱鍾建
物産獎勵를 비난한 「L君」에게 寄함 _ 反求室主人
社會主義와 資本主義의 立地, 社會主義學說 大要(其二) _ 사까이ㆍ도시히꼬 講演
또다시 「클라르테」에 대해서, 빠르쀼스연구의 一片 _ 金基鎭
朝鮮의 富力은 얼마나 되는가, -百三十億圓으로 槪算된다-_
각 停車場들의 品位
朝鮮 안에 사는 각 인종의 勢力消長
셰 번이나 본 共進會_ 想涉
鬱陵島行 _ 堤川 丁生
나 亦 求景의 榮光을 입던 니약이 _ 有狂熱
嶺南에 열닌 共進會들 _ 弄球生
동해의 一點碧인 鬱陵島를 찻고서 _ 李乙
北歐旅舍에서, 9월 15일 朴勝喆 _ 朴勝喆
李朝에 貢獻만흔 靑松 _ 一記者
그것이 第一이더라, 초신 行脚의 엿새동안 _ 小春
鐵原雜信 _ 在鐵原 一記者
全朝鮮 庭球大會를 보고 _ 一記者
前號의 「北鮮來信」을 보고, 國境生에게 質正함 _ 羅南 姜鶴秉(寄)
社告
그 동안의 世相
鏡城 朱乙溫에서 _ 朴春坡
自由通情(무엇이던지 써 보내시요. 自由通情 좀 해봅시다.)一瞥 _ 十目生
떠스터예브스키라는 사람과 밋 뎌의 작품과 _ 吳天錫
큰 물 뒤에(外 二章) _ 金石松
어두운 밤 숩 숙에서. _ 金石松
自然, 나, 詩. _ 金石松
祈願 _ 岸曙
희곡 婆娑(三片) _ 명희
눈을 겨우 뜰 때 _ 김동인
餘墨
해제
천도교단(天道敎團)에서 민족문화실현운동으로 세운 개벽사(開闢社)에서 1920년 6월 25일 창간호를 발간했다. 천도교는 항일운동과 신문화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중, 민족문학 수립과 민족전통 문화유산 확립을 기본으로 언론·학술·종교·문예를 게재하는 종합월간지를 발간하기로 하고, ‘후천개벽사상’에서 이름을 따 ‘개벽사’를 창업하고 『개벽』을 발간하게 된 것이다.
창간 당시 사장은 최종정(崔宗禎), 편집인은 이돈화(李敦化), 발행인은 이두성(李斗星), 인쇄인은 민영순(閔泳純) 등이었다. 창간 이유는 “세계사상을 소개함으로써 민족자결주의를 고취하며, 천도교사상과 민족사상의 앙양, 사회개조와 과학문명 소개와 함께 정신적·경제적 개벽을 꾀하고자 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전체 지면의 약 3분의 1을 문학과 예술면으로 할애하여 소설·시조·희곡·수필·소설이론·그림 등을 게재하였고, 문체는 국한문혼용체를 썼다.
그러나 창간호는 발간과 동시에 표지(호랑이 그림)와 「금쌀악」·「옥가루」 등 몇몇 기사가 문제가 되어 일제에게 전부 압수되고 말았다. 이에 문제가 된 기사를 삭제하고 호외(號外)를 냈으나 이것마저 압수되어 다시 임시호(臨時號)를 발행했다. 그 뒤에도 시련은 계속되었고, 결국 1926년 8월 1일 통권 제72호(8월호)를 끝으로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폐간되었다. 폐간될 때까지 발매금지(압수) 40회 이상, 정간 1회, 벌금 1회 등 많은 압력과 박해를 받았으며, 그로 인한 경영난도 심각했다.
1934년 11월 차상찬(車相讚)이 『개벽』을 속간하여 제1호부터 제4호까지 내었으나, 1935년 3월 1일 다시 폐간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전의 『개벽』과 성격을 같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광복 후 1946년 1월 김기전(金起田)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개벽』을 복간하여, 1926년에 폐간된 『개벽』의 홋수를 이어 제73호부터 시작하여 1949년 3월 25일(통권 제81호)까지 모두 9호를 발행하고 자진 휴간했다.
최근 일제에 의해 압수·삭제된 149개의 기사 중 기존 영인본에서 누락되었던 21개의 기사(작품) 원문이 한 연구서의 부록으로 간행되었다.
『개벽』의 기사 영역은 종교·사상·정치·경제·산업·역사·천문·지리·문학·미술·음악·제도·기술·풍속·풍물·인물·시사 등을 아우르고 있으며, 현란하고 화려한 광고들에서 보듯이 유통되는 상품 내지 근대문물 전체에 관심을 갖고 있을 정도로 종합지적인 개방성을 보였고, 이를 통해 성공적으로 대중에게 다가설 수 있었다. 특히 천도교 조직사업의 일환으로 발행했던 잡지인 『개벽』에 종교적인 글이 별반 실리지 않았던 반면, 다른 신문과 잡지에 비교해보더라도 문예에 대한 지면 할애가 두드러졌다는 점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개벽』은 1900년대 당시 계급주의적 경향문학을 지향하던 신경향파 초기의 작가들을 많이 배출하여, 지면의 3분의 1에 달하는 문예면에 그들의 작품을 게재했다. 김기진(金基鎭)·박영희(朴英熙) 등의 평론가, 조포석(趙抱石)·현진건(玄鎭健)·김동인(金東仁)·이상화(李相和)·염상섭(廉想涉)·최서해(崔曙海)·박종화(朴鍾和)·주요섭(朱耀燮) 등의 문인들이 주로 『개벽』을 무대로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김유정(金裕貞)도 단편소설을 1편 발표했다.
그밖에 노수현(盧壽鉉)·김은호(金殷鎬)·이상범(李象範)·오일영(吳一英)·김응원(金應元)·고희동(高羲東) 등의 그림도 자주 소개하였고, 강암(剛菴)·운양(雲養)·성당(惺堂)·석정(石汀)·긍제(兢齊) 등의 서예도 소개했다.
민족항일기의 『개벽』은 일제의 정책에 항거하여 정간·발행금지·벌금, 그리고 발행정지 등의 가혹한 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민족의식 고취에 역점을 둔 대표적인 종합잡지이다. 뿐만 아니라, 문예잡지 못지않게 문학이론의 전개, 문학작품의 발표, 외국문학의 소개, 신인 발굴 등 다각적인 배려를 함으로써, 1920년대 문학창달에 기여한 바가 커서 이 시기 문학연구에 귀중한 문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