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 구분
- 잡지 > 종합지
- 제호(잡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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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개벽 30호
- 한문開闢 30號
- 발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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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행인이두성
- 발행인 주소경성부 익선동 61번지
- 편집인이돈화
- 편집인 주소경성부 송현동 25번지
- 인쇄인민영순
- 인쇄인 주소경성부 청수정 8번지
- 출판사
- 開闢社 개벽사
- 발행지
- 京城 경성부 경운동 88번지
- 인쇄소
- 新文館 신문관
- 인쇄지
- 경성부 황금정 2정목 21번지
- 창간일
- 1920년 6월 25일
- 간행일
- 1922년 12월 1일
- 인쇄일
- 1922년 11월 28일
- 통권
- 30호
- 간별
- 월간
- 가격
-
- 기타52전
목차
開闢社社友制의 設行에 關한 趣意와 規定
[무제]
朝鮮의 發展과 朝鮮人의 發展
團結生活의 落第者와 及第者 _ 洋東室主人
우리의 社會에 새로히 비치우려하는 經濟思想과 經濟運動의 發現如何 _ 鮮于全
現中國의 舊思想, 舊文藝의 改革으로부터 新東洋文化의 樹立에 他山의 石으로 現中國의 新文學建設運動을 이약이함. _ 北旅東谷
平壤의 生産方面
朝鮮內에 在한 諸外人의 經濟的 勢力, 千分中 九百九十七分을 占有한 鑛業界에 在한 外國人의 勢力
內外로 觀한 彼의 二大勢力-恩平에서 東拓農場을 보고 _ 朴達成
暴風 暴雨와 싸우면서 九死一生으로 大阪에 着陸하기까지 _ 飛行士 安昌男
隨聞隨見
湖西의 一日, 湖西銀行의 新築落成宴을 機로 하야 _ 靑友生
入社의 感 _ 平南支社 李最煥
우리도 한 가지 일을 시작하엿습니다, 1922년 10월 12일 荷哇伊 호노놀루 港에서 _ 姜永韶
當局의 言論壓迫과 民衆의 輿論激昻, (言論의 擁護를 協同決議한 法曹界와 言論界)
11月 中의 世界와 朝鮮 _ 一記者
漢詩 _ 澹翁遺稿
에쓰페란토 自修室 _ 金億
天玄地黃
녯날의 꿈은 蒼白하더이다. _ 稻香(作)
前兆 _ 漂浪少年
가을 바람과 함께 _ 金岸曙
象徵的으로 살자 _ 卞榮魯
녯날의 거리 (외 1편) _ 요한
短章九題 _ 金石松
百濟時代의 彫刻, -朝鮮美術의 史的 考察 - (其九) _ 朴種鴻
月光(對話) _ 林蘆月
하믈레트 _ 쉑스피아(원작), 玄哲(譯述)
編輯餘言
社告
緊急社告
祝開闢大發展
해제
천도교단(天道敎團)에서 민족문화실현운동으로 세운 개벽사(開闢社)에서 1920년 6월 25일 창간호를 발간했다. 천도교는 항일운동과 신문화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중, 민족문학 수립과 민족전통 문화유산 확립을 기본으로 언론·학술·종교·문예를 게재하는 종합월간지를 발간하기로 하고, ‘후천개벽사상’에서 이름을 따 ‘개벽사’를 창업하고 『개벽』을 발간하게 된 것이다.
창간 당시 사장은 최종정(崔宗禎), 편집인은 이돈화(李敦化), 발행인은 이두성(李斗星), 인쇄인은 민영순(閔泳純) 등이었다. 창간 이유는 “세계사상을 소개함으로써 민족자결주의를 고취하며, 천도교사상과 민족사상의 앙양, 사회개조와 과학문명 소개와 함께 정신적·경제적 개벽을 꾀하고자 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전체 지면의 약 3분의 1을 문학과 예술면으로 할애하여 소설·시조·희곡·수필·소설이론·그림 등을 게재하였고, 문체는 국한문혼용체를 썼다.
그러나 창간호는 발간과 동시에 표지(호랑이 그림)와 「금쌀악」·「옥가루」 등 몇몇 기사가 문제가 되어 일제에게 전부 압수되고 말았다. 이에 문제가 된 기사를 삭제하고 호외(號外)를 냈으나 이것마저 압수되어 다시 임시호(臨時號)를 발행했다. 그 뒤에도 시련은 계속되었고, 결국 1926년 8월 1일 통권 제72호(8월호)를 끝으로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폐간되었다. 폐간될 때까지 발매금지(압수) 40회 이상, 정간 1회, 벌금 1회 등 많은 압력과 박해를 받았으며, 그로 인한 경영난도 심각했다.
1934년 11월 차상찬(車相讚)이 『개벽』을 속간하여 제1호부터 제4호까지 내었으나, 1935년 3월 1일 다시 폐간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전의 『개벽』과 성격을 같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광복 후 1946년 1월 김기전(金起田)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개벽』을 복간하여, 1926년에 폐간된 『개벽』의 홋수를 이어 제73호부터 시작하여 1949년 3월 25일(통권 제81호)까지 모두 9호를 발행하고 자진 휴간했다.
최근 일제에 의해 압수·삭제된 149개의 기사 중 기존 영인본에서 누락되었던 21개의 기사(작품) 원문이 한 연구서의 부록으로 간행되었다.
『개벽』의 기사 영역은 종교·사상·정치·경제·산업·역사·천문·지리·문학·미술·음악·제도·기술·풍속·풍물·인물·시사 등을 아우르고 있으며, 현란하고 화려한 광고들에서 보듯이 유통되는 상품 내지 근대문물 전체에 관심을 갖고 있을 정도로 종합지적인 개방성을 보였고, 이를 통해 성공적으로 대중에게 다가설 수 있었다. 특히 천도교 조직사업의 일환으로 발행했던 잡지인 『개벽』에 종교적인 글이 별반 실리지 않았던 반면, 다른 신문과 잡지에 비교해보더라도 문예에 대한 지면 할애가 두드러졌다는 점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개벽』은 1900년대 당시 계급주의적 경향문학을 지향하던 신경향파 초기의 작가들을 많이 배출하여, 지면의 3분의 1에 달하는 문예면에 그들의 작품을 게재했다. 김기진(金基鎭)·박영희(朴英熙) 등의 평론가, 조포석(趙抱石)·현진건(玄鎭健)·김동인(金東仁)·이상화(李相和)·염상섭(廉想涉)·최서해(崔曙海)·박종화(朴鍾和)·주요섭(朱耀燮) 등의 문인들이 주로 『개벽』을 무대로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김유정(金裕貞)도 단편소설을 1편 발표했다.
그밖에 노수현(盧壽鉉)·김은호(金殷鎬)·이상범(李象範)·오일영(吳一英)·김응원(金應元)·고희동(高羲東) 등의 그림도 자주 소개하였고, 강암(剛菴)·운양(雲養)·성당(惺堂)·석정(石汀)·긍제(兢齊) 등의 서예도 소개했다.
민족항일기의 『개벽』은 일제의 정책에 항거하여 정간·발행금지·벌금, 그리고 발행정지 등의 가혹한 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민족의식 고취에 역점을 둔 대표적인 종합잡지이다. 뿐만 아니라, 문예잡지 못지않게 문학이론의 전개, 문학작품의 발표, 외국문학의 소개, 신인 발굴 등 다각적인 배려를 함으로써, 1920년대 문학창달에 기여한 바가 커서 이 시기 문학연구에 귀중한 문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