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

- 구분
- 고문서 > 간찰 > 한문간찰
- 보낸이
-
- 조병덕
- 받는이
-
- 조장희
- 보낸날
-
- 5월 25일
내용
靑橋回傳
小僮來 見書爲慰 且病少歇者爲喜 今始寫出近齋先生諡狀-仲習筆-又裁別紙及京札於朴叔道矣 但未知貰去人貰錢路費之爲幾許 不得入錄于別紙中 量宜問之而 詳細報來於今日內 可也 各處書則 姑未裁而 所患今日如或譴却則 當今明間裁出矣 無論某人 必求其十分着實者 送之 可也 任白之訟 關我甚事 只是公共也 然不必對人言之 取人之疑也 白邁修亦來見而往 從白參奉周鎭云耳 補中益氣湯 無方文可怪 此亦錄送可也 只是醫書所載而已耶 汝兄往坪里不來耳 餘不具
五月卄五日父
明日早食後 欲往省親山耳
청교(靑橋)에 돌아가는 인편에 전함
소동(小僮)이 가져온 편지를 보니 위로가 된다. 또 병이 조금 덜하다니 기쁘다.
이제야 비로소 근재선생시장(近齋先生諡狀)을 정서(淨書)했다.-중습(仲習)이 썼다- 또 별지(別紙)와 서울 박숙도(朴叔道)에게 보내는 편지도 썼다. 다만, 세거인(貰去人)이 누구인지 삯〔貰錢〕과 노자가 얼마인지 몰라서 별지에 써넣지 못했다. 적당히 헤아려 물어서 오늘 안으로 상세히 알려다오. 각처에 보낼 편지는 아직 쓰지 못했으나, 아픈 것이 오늘 혹 나으면 오늘내일 쓸 것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반드시 정말 착실한 사람을 구하여 보내야 된다.
임백(任白)의 송사(訟事)가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단지 공적인 일일 뿐이다. 그러니, 남에게 이야기하여 남의 의혹을 살 필요는 없다. 백매수(白邁修)도 와서 만나고 갔는데, 참봉 백주진(白周鎭)을 따른다고 하더라.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 약방문이 없으니, 이상스럽다. 이것도 적어 보내라. 단지 의서(醫書)에 기재되어 있는 것뿐이냐?
네 형은 평리(坪里)에 가서 안 왔다.
나머지 사연은 이만 줄인다.
5월 25일 아버지
내일 이른 밥을 먹고 아버지 산소에 성묘하러 가려고 한다.(탈초, 번역: 하영휘)
※ 소동(小僮) : 어린 사내 종. 동복(僮僕).
근재선생시장(近齋先生諡狀) : 근재는 박윤원(朴胤源, 1734~1799)의 호이고, 시장은 대신이나 학자에게 시호(諡號)를 내릴 때 참고할 수 있도록 그 인물의 평생 업적을 기록한 글을 말한다.
별지(別紙) : 다른 종이에 써서 본래의 글과 동봉하는 글. 여기서는 시장에 동봉하는 글을 말한다.
세거인(貰去人) : 삯을 받고 심부름 가는 사람. 다음 편지의 전인(專人)을 말한다.
임백(任白)의 송사(訟事) : 임씨와 백씨의 송사. 산소 문제로 얽힌 시비, 즉 산송(山訟)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해제
아버지 조병덕(趙秉悳, 1800~1870)이 아들 조장희(趙章熙)에게 보낸 편지다. 근재선생시장을 써서 정서하고 나서 그것을 서울에 가져갈 사람으로 ‘누구를 막론하고 정말 착실한 사람을 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시장이 그만큼 중요한 글이기 때문이다. 근재 박윤원은 김창협(金昌協), 이재(李縡), 김원행(金元行)으로 이어지는 노론의 학통을 계승한 적전(嫡傳)으로, 다시 문하의 홍직필(洪直弼)에게 자기 학문을 전수했다. 조병덕이 바로 홍직필의 제자다. 학자의 시장은 주로 그 학문의 적통을 계승한 사람이 썼다. 조병덕이 박윤원의 시장을 쓴 것은 조병덕이 박윤원 학문의 적통을 계승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병덕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시장이었다.
아버지는 삼계리(三溪里)에 살았고, 아들은 청석교(靑石橋)에 살았다. 삼계리는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보령시 미산면에 속하고, 청석교는 보령시 주산면에 속한다. 두 지역의 거리는 간재를 사이에 두고 10리에 불과했지만, 그 성격은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
삼계리는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은둔하기에 적당한 곳이었고, 청석교는 한산모시의 집산지로 유명한 간치장이 있어 당시로서는 꽤 번화한 곳이었다. 아버지는 19세기 노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인격수양을 위주로 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하며 삼계리에 은둔했고, 아들은 불량배를 거느리고 청석교 옆의 간치장을 무대로 포악질을 일삼고 이권에 개입한 토호였다.
아들은 아버지의 창구 역할을 했다. 아버지가 외지로 보내는 편지들을 써서 설명과 함께 아들에게 보내면 아들이 그것을 각지로 부쳤다. 그렇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 1700여 통이 고스란히 남아 아단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19세기 조선사회를 이만큼 사실적으로 그려주는 자료는 흔치 않다.(해제: 하영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