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 구분
- 잡지 > 대중
- 제호(잡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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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삼천리 제1호
- 한문三千里 創刊號
- 기타三千里 七月號
- 발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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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쇄인沈禹澤
- 인쇄인 주소京城府 公平洞 55番地
- 편집 겸 발행인金東煥
- 편집 겸 발행인 주소京城府 敦義洞 74番地
- 출판사
- 三千里社 삼천리사
- 발행지
- 京城府 敦義洞 74番地
- 인쇄소
- 大同印刷株式會社 대동인쇄주식회사
- 인쇄지
- 京城府 公平洞 55番地
- 발매소
- 博文書舘 박문서관
- 발매지
- 京城 鍾路 2ノ82
- 창간일
- 1929년 6월 12일
- 간행일
- 1929년 6월 12일
- 인쇄일
- 1929년 6월 10일
- 통권
- 1호
- 간별
- 월간
- 형태
-
- 면수50page
- 가격
-
목차
사고(社告) =기1(其一)
사고(社告) =기2(其二)
사고(社告) =기3(其三)
우리의 표어(標語)
돈 십만원(十萬圓)이 잇다면?
진서(眞書)와 원서(原書) _ 동경(東京)에서 설의식(薛義植)
세계(世界)에 향(向)하야, 조선(朝鮮)에 큰 과학자(科學者)가 나서 세계적(世界的)으로 진출(進出)하자 _ 민세 안재홍(民世 安在鴻)
세계일주기행(제1신)(世界一週紀行)(第一信), 태평양(太平洋)의 노도(怒濤) 차고 황금(黃金)의 나라 미국(美國)으로! 포와(布哇)에 잠감 들러 형제(兄弟)부터 보고 _ 허헌(許憲)
명문장(名文章), 동무의 장송사(葬送辭) _ 실명씨(失名氏)
자서전(自叙傳) _ 홍명희(洪命熹)
동무를 부름 _ 정칠성(丁七星)
우리의 은인(恩人) _ 신흥우(申興雨)
사형수의 최후 _ K판사
천고비극(千古悲劇)의 주인공(主人公)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의 최후(最後), 낙화암상(落花岩上)의 로-맨쓰 _ 문일평(文一平)
명문장(발화)(名文章)(拔華), 참새 _ 투르케-넵흐
과거사연구(過去事硏究)-신라(新羅)의 찬연(燦然)한 문명(文明)과 신라민중(新羅民衆)의 영화(榮華), 그 서울 경주(慶州)는 엇더하엿나(1) _ 황의돈(黃義敦)
사고(社告) _ 삼천리사
갓츄사 유배(流配)가든 서백리아정조(西伯利亞情調) _ 김동진(金東進)
잡담실(雜談室), 객사(客死)한 학자(學者)
여인국순례(女人國巡禮), 제주도해녀(濟州道海女) _ 김두백(金枓白)
여인국순례(女人國巡禮), 사찰(寺刹)의 승녀(僧女) _ 정인익(鄭寅翼)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에
미두(米豆)로 백만장자(百萬長者)된 화실(話實), 애인(愛人)일코 분(墳)낌에 미두(米豆)하여 20만원을 따, 수원에서 서긔다니든 청년 일약하야 백만장자가 되어 _ 정수일(鄭秀日)
백만장자(百萬長者)가 몰락(沒落)한 실화(實話), 시세를 잘못 보아 일조(一朝)에 백만원(百萬圓)을 일어, 결혼비용으로 일만원 쓰든 그가 지금은 적젹무문
문단행진곡(文壇行進曲)
명탐정비화(名探偵秘話), 살인사건(殺人事件)과 지문(指紋) _ N경부(警部) 구술(口述)
민족문학(民族文學)과 무산문학(無産文學)의 합치점(合致点)과 차이점(差異点)
압수기록(押收記錄)
전조선문사공천(全朝鮮文士公薦) 신선(新選) 「반도팔경(半島八景)」 발표(發表), 그 취지(趣旨)와 본사(本社)의 계획(計劃)
논개(論介)야 논개(論介)야 부르며 초하(初夏)의 촉석루(矗石樓)차저, 역사(歷史)와 가현(歌絃)의 도시(都市) _ 진주성(晋州城)에서 김동환(金東煥)
삼대신문(三大新聞)의 소설(小說)
압수기록(押收記錄)
잡담실(雜談室), 천력(天力)의 노재(努才)
나체(裸軆)모델과 화가(畵家)의 감촉(感觸)
문학상 저명지순례(文學上 著名地巡禮)(1) 춘원(春園)의 무정편(無情篇), 박영채(朴映彩) 김선형(金善馨)이가 음악연주(音樂演奏)하든 삼랑진(三浪津) _ 초공(草公)
시가(詩歌) _ 한용운(韓龍雲)
새나라로(외 1편) _ 춘원(春園)
매화동(賣花童)(외 1편) _ 이은상(李殷相)
고향(故鄕)생각 _ 여수(麗水)
송삼천리(頌三千里) _ 심훈(沈熏)
썩은 호도(胡桃) _ 염상섭(廉想涉)
편집후기(編輯後記)
해제
1929년에 취미와 시사 중심의 대중지 성격으로 발행한 교양 잡지. 편집인 겸 발행인은 김동환(金東煥)이며, 삼천리사(三千里社)에서 발행했다.
1929년 6월 창간되어 월간·격주간 등으로 B5판, B4판 또는 A5판으로 간행되다가, 『대동아(大東亞)』로 제명을 고쳐 1942년 3월과 7월 두 호를 더 내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취미 중심의 잡지였으나 저급한 취미로 타락하지는 않았으며, 주로 ‘고십난’에 치중해 호기심을 끌 만한 특종(特種)을 잘 포착해 지상(誌上)에 곧 반영시켰다.
우리 문학에 끼친 공로도 적지 않아서 문단의 중견작가 여럿이 집필한 「문예강좌」와 김동인(金東仁)의 「춘원연구(春園硏究)」, 여러 중견작가의 작품연대표 등은 특기할 만한 내용들이다.
그러나 과장과 공상이 지나치고 제목에 비해 내용이 빈약한 것이 커다란 흠이며, 무엇보다도 그 친일적인 성격 때문에 비난을 면하기 힘들다.
초기는 민족적 입장에 섰으나 1937년 이후부터 점차 친일적인 경향으로 바뀌기 시작해, 마침내는 친일파 · 민족반역자를 등장시켜서 반민족적 잡지로 전락했고, 끝내는 친일 잡지 『대동아』로 개명까지 했다.(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